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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Oct 22. 2023

다 들리는 혼잣말

3

우리 시할머니의 함자는 이 입자, 분자 이시다.

'이입분(李立分)'. 할머니의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한다. 3남매의 맏이였던 할머니는 태어날 때 부터 살결이 희고 고왔다 한다. 하얗고 동글동글하니 너무도 예쁘게 생겨 "이쁜아, 이쁜아~" 하던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한다. '이쁜이'라는 이름에 가장 가까운 한자를 찾아 '立分'이라고 올렸다 한다.

할머니는 지금도 살결이 하얗고 고우시다. 살성도 좋아 상처가 나도 금방 아문다. 밖에 나가선 항상 예쁜 미소를 지으시고, 사람들 싫은 소리는 않으신다. 어르신들은 곧잘 싸우시기도 하고 큰 소리도 내신다는데, 할머니는 어디 가서 큰 소리를 내시거나 한 적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결혼 후 한 달에 한두번씩 할머니댁에 갈 때면, 할머니가 끓여놓은 미역국과 김치찌개를 퍼서 먹고, 설거지만 했다. 음식을 하라시지도, 청소를 하라시지도 않았다. 그냥 맛있게 밥 먹고, 치우고, 함께 TV 보다 오면 되었다. "할머니, 제가 뭐 할까요?" 하고 물으면, 찬장에서 간장을 꺼내라든지, 가스불을 켜라든지 하는 잔심부름이 다였다. 손 부끄럽고 민망했지만, 한편으론 편하고 감사했다. 사분사분한 목소리로 웃으며 맞아주시는 할머니가 참 고마웠다.


신혼 때는 왜 그리도 시댁에 안부전화를 해야 했던지...... 울 엄마, 아빠한테도 달에 한 번 전화를 할까 말까(그마저도 용건이 있어야)인데, 시어른께는 왜 그리도 꼬박꼬박 전화해 식사는 하셨는지, 별 일은 없으신지를 묻고 또 물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매일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 마무리는 오늘도 무사안녕하라는 인사.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으레 그렇게 해야한다 생각했고, 이제 그만 해라 소리가 없으면 언제까지 해야 할 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어쩌다 신랑이 전화를 하면 나는 뭐 하고 있냐 물으셨고, 어쩌다 전화를 깜빡하면 이내 전화를 걸어 뭐 하냐 물으셨다. 그런 전화가 싫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불편했다. 내가 건 게 아닌 걸려 온 전화를 받을 때면 내가 먼저 전화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지금이야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 것에 까지 신경을 쓰나 싶지만, 그 때는 그랬다. 며느리 된 도리를 못한 것 같아 "죄송해요."소리가 먼저 나왔다.

어느 날엔가, 화장실을 갔다가 할머니 전화를 못 받은 적이 있었다. 벨이 울리기에 부랴부랴 수습을 하고 뛰어나와 핸드폰을 집어들었는데 그만 끊기고 말았다. 아차, 오늘 전화를 드리지 못했구나 싶어 얼른 다시 전화를 걸려는데 띠리링~ 음성메세지가 도착했다. 음성메세지라고? 요즘엔 잘 쓰지 않는 음성메세지가 도착했다니 뭔가 싶어 확인을 했다.


"늬미, 처자빠져 자나?"


순간 나는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심장은 마구 요동치고, 머리 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시할머니의 목소리는 지금껏 내가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항상 웃으며 좋다 좋다 말씀하시던 할머니신데, 이건 분명 내가 아는 할머니의 말투가 아니었다. 아마 음성으로 넘어간 걸 모르고 혼잣말을 하신 게 녹음이 된 것이리라. 전화가 넘어가도록 받지 않아 기분이 상하셨나 싶어 얼른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냐 화내시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죄송하다 해야지 했다. 벨이 서너번 울리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셨다.

"여보세요~"

할머니다. 내가 알고 있던 할머니다. 미소를 띄고, 사분사분하고 친절하게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다.

"할머니, 전화하셨었어요? 제가 화장실에 있느라 전화를 못받았어요."

"응~ 어쩐지. 뭐 바쁜 일이 있겠거니~ 하고 끊었어. 괜찮아."

1분 전 내 전화에 욕을 한 사람은 누구인가? 할머니는 너무나도 평온하고 자상하게 신경쓰지 말라 하셨다. 내 전화기에 할머니의 혼잣말이 녹음된 걸 전혀  모르신 채, 할머니는 다정하게 밥 잘 챙겨먹으라 하셨다. 너희만 잘 살면 되지 내 걱정은 하지 마 하셨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다. 할머니의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웠다. 나를 마냥 예뻐하신다 생각했는데, 집에서는 마냥 처자빠져 자는 년으로 생각하고 계신가 싶어 서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내 앞에선 예쁜 웃음을 보이시면서 내 뒤에선 눈을 흘기고 계신 것만 같아 무서웠다. 할머니의 "괜찮아"가 실은 "괜찮지 않아" 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갑자기 할머니가 아주아주 멀고, 아주아주 어렵게만 느껴졌다.


시간은 참 신기하기도 하지. 그 땐 그 일이 참 서럽고, 가슴떨렸는데 어느 새 그 감정을 잊고 살게 된다. 다시 또 하하호호 웃으며 잘 지내게 된다.


할머니와 살림을 합치고 얼마간은 참 재밌었다. 저녁을 먹고 치운 후 할머니 방에 들어가 일일드라마를 함께 보며 바람 핀 드라마 속 남편을 욕하고, 내연녀를 욕했다. 어쩌다 한 번 씩 팩을 할 때면 할머니 얼굴에도 같이 붙였고, 손질해야 할 나물들이 있으면 할머니 방에서 함께 손질했다. 대화할 때 할머니는 미소를 띄셨고, 목소리도 사분사분 하셨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에 지레 겁을 먹었던 걸 후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 처럼 할머니와 둘이서 수다 떨며 점심을 먹고난 후 할머니는 방에 들어가 TV를 보시고,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늘 앉아계신 할머니 방 침대에서는 거실의 소파가 직통으로 보였다. 그 날도 할머니 눈에 늘어지듯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내가 보였을 것이다.


"늬미~ 집안을 이 꼬라지를 해 놓고 저기 처앉아서 저러고 있네!"


너무 깜짝 놀라 고갤 들어 할머니 방을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할머니도 놀라셨는지 얼른 시선을 TV 로 옮기셨다. 나는 혹시나 TV를 보시다 혼잣말을 하신건가 싶어 물었다.

"할머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나 아무 말도 안했는데?"

할머니는 다시 사분사분한 말투로 대답하셨다. 너무나도 예쁜 미소를 지으시고, 너무나도 다정하게......

손이 떨리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불현듯 잊고 지냈던 순간이 떠올랐다. 10년 전, 나의 핸드폰에 음성메세지를 남긴 할머니의 목소리, 낯설고도 낯선 그 날의 목소리, 하지만 정작 내 앞에선 모든 게 다 괜찮다시던 그 무섭고 혼란스럽던 순간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지금의 상황과 뒤섞였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 날 이후, 할머니가 방에서 무슨 말이라도 하시면 심장이 요동쳤다. 혹시 또 내 욕을 하시는가 싶어 온 신경이 할머니 방으로 쏠렸다. 할머니 시야에 걸리지 않는 사각지대를 찾아나섰고, 부엌 씽크대와 씽크대가 ㄱ자로 만나는 어느 구석이 나의 은신처가 되었다. 나는 소파 대신 그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핸드폰도 보고, 책도 보고, 차도 마셨다. 그렇게 마음의 벽이 조금씩 쌓여갔다. 내가 쪼그려 앉은 딱 그만큼의 방이 마음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8년이 또 지난 지금, 이제는 할머니가 내 전화기에 대고 "늬미~ 처자빠져 자나?"를 내뱉으셨다는 걸 웃으며 이야기 할 정도가 되었다. 그깟 일로 손을 떨지도 않고, 심장이 나대지도 않는다. 그래, 그 땐 그랬지 한다. 할머니와 함께 살 지 않았던 때 보다 할머니를 좀 더 알게 되었고, 할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 내공도 키워졌다. 할머니와 큰 소리로 싸우기도 하고, 할머니와 깔깔거리며 웃기도 한다. 여전히 부엌 씽크대 구석에 앉아있을 때도 있지만, 소파에 늘어져 있을 때도 많다. 마음의 벽은 어느 날 부터 더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벽이 시원하게 와르르 무너진 것도 아니지만, 고립되지 않을 만큼, 상처받지 않을 만큼 적당히 쌓인 벽은 때때로 마음의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할머니는 요즘도 다 들리는 혼잣말을 하시곤 한다. 다 들리는 혼잣말의 묘미는 욕이다. 주로 TV에 나오는 사람들을 욕하시지만, 간혹 내 욕도 심심찮게 들린다. 욕의 수위도 많이 올라갔다. '늬미~'에서 끝나던 것이 요즘엔 무슨 년, 무슨 년...... 화려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동요되지 않는 이유는, 할머니에게 찾아 온 치매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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