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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과 나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6학년 2학기 중반무렵 신랑이 전학을 왔다. 당시 왈가닥 중의 왈가닥이었던 나는 우리 학교에서 키가 가장 컸던(지금까지도 나와 가장 친한) 친구와 수첩 하나씩을 끼고 전학생 최조(?)를 나서곤 했다.
“넌 이름이 뭐야?”
“생일은 언젠데?”
“취미는? 특기는 있어?”
깡 마른 여자애가 뒤에 길쭉한 여자애를 세워두고 퍼붓는 시덥잖은 질문에 전학생들은 약간 어리둥절 하기도 하고, 조금은 위압감도 느껴 제 생일이며, 취미며, 특기를 술술 불었다. 신랑이 전학왔던 날도 나는 수첩을 손에 들고 키가 제일 큰 내 친구와 출동을 하였다. 내 친구보다도 키가 크고 얼굴이 까무잡잡했던 신랑은 나를 슥~ 한번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연애를 하며 신랑에게 그 날을 물었더니, 어디서 쪼꼬만 여자애가 다가와 별 시덥잖은 것들을 묻기에 ‘얜 또 뭐야?’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10여년이 흐르고 한참 ‘아이러브스쿨’과 동창 모임이 유행하던 때 우리는 다시 만났다. 같이 축구, 말뚝박기, 공기놀이 등을 하고 놀았던 동창 남자 녀석들에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신랑은 달랐다. 아마도 같이 논 기억이 없으니 친구같은 느낌이 덜 했던 듯 하다.
신랑과 4년을 연애했다. 신랑은 (나한테 만큼은) 자상했고, (내게 있어선) 재밌었고, (나에 대해선) 배려심이 깊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스며들 듯 조금씩 조금씩 사랑이 커져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렇게 결혼까지 가겠구나 느꼈다.
한참 콩깍지가 두 겹, 세 겹 껴있던 시절의 어느 날, 신랑이 내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결혼을 하면, 어쩌면 할머니랑 같이 살아야 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 손에 큰 신랑이었다. 할머니가 신랑에겐 엄마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걸 너무 잘 알기에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절할 생각을 못했다. 눈 앞에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너무너무 좋아서 어떤 폭탄발언을 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혼을 약속하고, 신랑의 작은아버지, 어머니께 첫인사를 드리기로 한 날, 나는 그 자리가 어려워 고깃집 불판에 맛있게 익어가던 고기 대신 앞에 놓인 양파절임만 젓가락으로 뒤적거렸다. 이런저런 이야기 말미에 작은아버지께서 물으셨다.
“결혼하고 나중에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신랑은 “네.” 하고 대답했다. 작은아버지는 잠깐의 침묵 뒤에 나를 향해 “고맙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인 자신이 아닌 조카가 어머니를 모신다 하니 고맙고, 미안하고…… 어른들 입장의 ‘요즘 것’인 예비 조카며느리가 시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에 찬성한 것 또한 고맙고, 미안하고…… 아마 작은아버지의 마음에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돌고 돌았을 것이다.
4년 연애에 종지부를 찍고, 결혼 10년차에 우리는 할머니와 살림을 합쳤다. 신혼집 10년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하면서 할머니와 함게 살던 도련님은 독립을 했고, 할머니는 짐을 줄여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이때는 미처 몰랐다. 할머니와 함게 웃고, 울고, 지지고, 볶는 시간들이 정신없이 불어닥치리란 사실을…… 그로 인해 내가 결국엔 글을 쓸 수 밖에 없게 되리란 사실을…… 그래서 힘들고, 그래서 감사한 이 모든 순간순간이 어떤 날개짓이 되어 내게 어떤 태풍을 맞닥뜨리게 할 것인지…… 그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