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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당뇨 정기 검진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간 어느 날이었다. 늘 그렇듯 예약환자, 당일 접수환자로 대기실은 북적북적했다. "이입분님 보호자분!" 20여분 정도 기다리니 이름이 불리웠다. "네!"하고 대답하고는 나는 조용히 담당의사선생님 방 문을 열었다.
"당 수치가 너무 높네요. 여기도, 여기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당 조절이 안되고 있어요."
나는 얼굴이 따끈해졌다.
매번 이 의사선생님 앞에 앉으면 마치 교무실에 불려 온 학생처럼 나는 움츠려들었다.
"지난 번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보세요. 당수치가 괜찮았죠? 조절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집에만 가시면 당조절이 안돼요. ...... 물론 보호자분을 탓하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탓하는 건 아니라 하셨지만, 나는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물론 고령이시고, 치매도 있으시고, 아마 통제가 힘들거예요. 그래도 이렇게 조절이 안되시면 더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가뜩이나 움츠러든 어깨를 더 움츠려 귀 뒤에 붙였다.
"이미 인슐린 주사 20단위를 맡고 계시고, 트루리시티도 맡고 계시고..... 주사를 더 늘릴 순 없어요. 당뇨약도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용량이 많은데 여기서 더 늘릴 수는 없습니다. 방법은 지난 번 처럼 입원 하셔서 당수치를 좀 내리시고 조절이 좀 되면 다시 퇴원하시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게 안되면 그냥 집에서 하루에 주사 3번씩 맞으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선택은 보호자분이 하시는 거니까, 일단 가족들하고 상의를 해 보세요."
할머니는 두 달 전에도 입원을 하셨었다. 고령에 치매도 있으시기에 보호자가 상주해야 하는데, 코로나 시국이라 한 번 들어간 보호자는 환자 퇴원 때 까지 꼼짝없이 병원에 있어야만 했다. 교대나 외출이 가능하면 나와 가족들이 적절히 돌아가며 할머니 곁을 지켜도 되지만, 언제 퇴원할 지 모르는 상황에, 재택으로 하고 있는 일도 있고, 아이도 있는 마당에 내가 들어가 꼬박 상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작은집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약하신 작은어머니께서 불편한 보호자 침대에서 주무셔가며 2주 이상 간병생활을 하실 수는 없었다. 두 달 전에는 그래도 할머니께 절대 혼자 움직이시면 안된다 신신당부를 하고, 움직임이 포착되면 간호사실로 알람이 가는 패드도 침대 위에 깔고 하여 간병병동에 입원을 하실 수 있었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간병병동도, 알람이 가는 패드도 상관없이 무조건 보호자가 상주해야 한단다.
"다른 분 같았으면 지금 당장 입원하라고 하겠지만, 할머니는 워낙 고령이시고, 이제는 다른 기관들도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글쎄요. 입원을 하는 게 아니시면 집에서 주사나 약으로 하시거나 해야 하는데...... 뭐, 포기하는 거죠. 선택은 보호자분이 가족과 상의해서 하세요."
의사선생님은 나의 죄책감에 쐐기를 박으셨다. 할머니를 입원시키지 않으면 나는,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포기한 자식이 되는 것이다.
매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할 때면 나는 더더욱 죄인이 되었다. 할머니의 당 조절 마저 못하는 며느리, 간병을 위해 병원에 상주하지도 못하는 며느리, 간병인을 며칠이고 쓸 수 있는 돈도 없는 며느리.
완치는 아니더라도 어찌됐든 입원이 필요한 상황에 할머니의 입원을 놓고 가족회의를 해야하는 상황이 가슴 아팠다.
"당조절만 하는 거면 작년에 할머니 입원해 계셨던 요양병원에 잠깐 입원하시는 건 어떨까? 거기도 내과가 있어서 의사선생님 진료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물리치료실이 있어서 할머니 입원기간 동안 운동도 계속 하실 수 있고, 방마다 간병선생님들이 계시니 안심이고......"
작은 어머니께서 한숨 끝에 떠오른 듯 말씀하셨다. 2019년 추석에 급성뇌경색으로 병원에 2달 입원하셨다가 재활하러 들어갔었던 요양병원이었다. 작은 어머니댁 근처이기도 하고, 제법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병원이었는데, 내과와 신경과, 가정의학과, 재활의학과는 물론 한방과도 있어 진료와 처방이 가능하여 할머니가 후유증 없이 재활을 마치고 퇴원하실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할머니도 기왕 입원을 한다면 그 병원이 좋다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다음 날, 병원에 전화를 걸어 요양병원으로 입원을 하셔도 괜찮을지 물었더니, 간호사분께서 아무래도 내원해서 의사선생님께 직접 문의를 해보시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셨다. 4시쯤 다시 병원에 갔다. 기다림 끝에 선생님을 다시 마주했을 때, 나는 또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선생님, 혹시 입원하셔서 받으시는 치료가 당뇨 수치 내리는 것 뿐인가요?"
선생님은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면, 할머니께서 입원하신 적이 있는 요양병원에 2~3주 입원하시면서 당수치 잡고 퇴원하셔도 될까요? 그곳은 간병문제도 해결이 되고, 운동도 병행할 수 있...."
나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은 소리로만 부드러운(하지만 말투는 너무나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럼요. 가능하십니다. 대신 저는 더이상 못봐드립니다. 앞으로 그 병원에서 당뇨 치료 계속 받으시면 됩니다."
"네? 아니, 그 병원에서 당 수치 잡을 동안만 입원하셨다가 퇴원하고 나면 다시...."
"타 병원에 장기입원하면 그 병원에 적을 두셔야죠."
"2~3주 입원하고 퇴원하실건데요?"
"2~3주면 저희는 장기입원입니다. 퇴원하시고 그 병원이 아니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내과로 다니셔도 되구요."
"가장 가까운 병원이 여긴데요."
"그래도 저는 안됩니다. 다른 병원으로 아예 적을 바꾸셔야 합니다."
"할머니 뇌경색으로 여기서 치료받다가 재활때문에 그 요양병원으로 옮기시고, 퇴원하신 후 다시 이 병원으로 왔었는데 그 땐 왜..."
"그건 예전 이야기구요. 예전에 어떻게 했든 그건 지금 상관 없구요, 저는 지금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못봐드려요."
나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가족들과 다시 상의해보고 연락드린다 하고 방을 나왔다. 뭔지 모를 감정이 손 끝까지 퍼져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간호사 선생님이 의사선생님이 뭐라셨는지 물었다.
"요양병원에 입원하셔도 되지만, 만약 그럴 경우엔 앞으론 선생님께 진료를 못받는다고 하세요."
간호사 선생님께서도 놀라시며 되레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다른 병원 선생님과 여기 선생님 치료 방법이 달라서 그러셨을 거예요. 가족분들이랑 다시 상의해 보시고 전화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의사선생님 말씀에 우리 가족은 멘붕에 빠졌다. 물론 이해가 가기도 했다. 간호사 선생님 말씀처럼 의사선생님들마다 처방이 다를테니 그러실 수도 있겠지. 그런데 도저히 납득이 안되었다. 이 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되어 최대한 입원 가능한 곳을 찾았는데, 그 병원으로 가면 앞으로 다시는 자기한테 진료를 못받는다 못박는 것이, 그렇게 말하는 의사선생님이,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직업인지 안다. 소아과, 안과, 치과, 내과, 산부인과 등등등 수많은 병원의 수많은 의사선생님들이 모두 다 친절하고 자상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친절하고 다정한 건 기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너무 과하게 친절한 것 보다는 무뚝뚝해도 할 말을 제대로 다 해주시는 분이 더 좋다. 하지만, 무뚝뚝한 것을 넘어 무시를 당하는 느낌을 주는 의사선생님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어려운 설명을 못알아들을 땐 한숨을 내쉰다거나, 질문을 하면 도중에 말을 끊고 면박을 준다거나, 보호자가 제대로 돌보지 않아 증세가 악화되었다 죄책감을 키워주는 선생님 또한 적지 않았다.
나는 이 병원의 이 선생님을 만날 때면, 항상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저 말투가 그런 것이려니, 실은 이런 뜻인데 표현이 그랬을 뿐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며 다녔다. 보호자들은 물론이고 환자들 사이에서도 차갑고 싸가지 없다 소문이 자자했지만, 오히려 허튼 소리 안해서 괜찮다고 위안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어떤 것으로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보호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의사, 이유야 어떻든 한 번 떠난 환자는 다시는 받지 않겠다는 의사.
그 날 오후, 나는 작은어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당뇨 치료를 위한 새로운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길 위에서 두 며느리는 죄책감을 공유했다.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며느리와, 할머니를 제대로 케어하지 못하는 손주며느리는 요양병원이라는 공통의 죄책감을 또 같이 나눠 지었다. 아들도, 손주도 모르는 며느리들만의 죄책감을 서로의 등에, 어깨에 차곡차곡 나누어 짊어지고 눈물에 흐릿해진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