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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옮기고 부터는 한 달에 한 번, 할머니의 약을 타러 병원에 갔다. 이전에 다니던 병원에서는 두 달에 한 번 약을 타러 갔었다. 별다른 증상이 없는 이상 1년에 두세번 정도 혈색소 검사와 이런저런 검사를 위해 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갔고, 나머지는 그냥 나 혼자 병원에 가 약을 처방받았다. 물론 4, 5년 전까지만 해도 매번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었다. 의사선생님 얼굴만 보고 지난 번과 똑같은 약을 그대로 처방받아 올지언정 할머니 손을 잡고 병원 2층으로, 3층으로 오르락내리락했었다. 할머니 연세가 90에 가까워지고, 걸음이 예전만 못하게 되었을 때 병원에선 크게 이상이 없다면 보호자만 와서 약처방을 받으라고 했다. 그 때부터 나는 할머니가 여느때와 다르지 않으시면 혼자 가서 처방전을 받아 약을 지어왔다.(그렇다고 할머니가 1년에 두세번만 병원에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위의 병원은 할머니의 주 질환인 당뇨와 혈압, 치매에 관련된 병원인거고, 내과, 한의원, 치과, 안과, 비뇨기과, 소화기내과, 간간히 영양제 맞으시기 위해, 간간히 응급실…..그 때 그 때 방문해야 하는 병원은 따로 있었다.)
이 날은 내분비내과와 신경과, 그리고 정형외과 약을 타러 병원에 왔다. 내분비내과에선 당뇨와 혈압약, 인슐린주사를, 신경과에선 치매약과 안정제, 변비약, 어지럼증약, 혈전제, 콜레스테롤약, 그리고 수면제를, 정형외과에선 진통제와 위장약을 처방받았다. 할머니가 드시는 약이 원체 많은지라 병원에선 웬만하면 약을 줄이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약이 느는 것은 괜찮지만 약이 하나라도 줄면 할머니는 금방 드러누우시기 때문이다. 정형외과에서 처방받는 약은 타이레놀과 하나파모티딘정, 그리고 씨콕스인데 이 중 둘은 진통제이고 하나는 위산분비 억제제이다. 이 약은 10여년 전 무릎 수술 후 통증 완화를 위해 드셨던 약인데 이 때까지도 끊지 못하고 쭉 드시고 계셨다. 담당 의사선생님께서 벌써 10여년 째 그만 드셔도 된다고, 안드시는 게 좋다고 수없이 말씀하셨지만 이 약을 안드시면 당장 다리가 떨리고 너무 아파 걸을 수 없다시며 화를 내고 드러누우시는 바람에 결국 두세달 드셔야 하는 약을 10여년 째 드시고 계셨다. 그 전 달 약을 지으러 갔을 때, 씨콕스가 더 강한 진통제이니 타이레놀과 하나파모티딘은 빼고 씨콕스만 드셔보시도록 해보자고 하셔서 그렇게 했더니, 타이레놀과 하나파모티딘이 떨어진 날 부터 할머니는 무릎통증을 호소하셨다. 집에 있는 타이레놀을 드려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똑같은 약이어도 병원에서 주는, 약봉지에 들어간 약과 약국에서 그냥 사 온 약은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름을 시달리다 결국 이 날 다른 과 처방전을 받으러 온 김에 정형외과에 들러 타이레놀과 하나파모티딘을 처방받아왔다. 선생님께선 이렇게 약을 오래드시면 오히려 간에 무리가 갈 수 있다셨지만, 그 얘기를 할머니께서 이해하실 리 만무했다. 결국엔 선생님들도, 이제 연세가 있으시니 크게 위험하지 않는 이상 원하시는대로 해 주실 수 밖에…. 하셨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면 약이 나올 때 까지 30분은 족히 걸렸다. 사람이라도 많이 몰리는 날에는, 처방전을 주고 아예 1시간 나가서 차를 마시거나 장을 보거나 했다. 할머니의 이름이 불리고 약사 선생님 앞으로 가면, “이입분님 약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어요.”라며 미안해하셨다. 사실 선생님이 미안할 건 없는데 말이다.
“아우, 근데 약이 정말 너무 많으세요.”
늘 듣는 이야기다.
‘아이고, 이 약이 전부가 아니예요~^^;;;’
하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침에 드시는 혈압약이랑 당뇨약, 이건 저녁에……..아, 보호자님 다 아시죠?”
하며 약사선생님이 웃으셨다. 나도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동안 탄 변비약이 꽤 남아 이번엔 변비약 처방을 받지 않았다. 어지럼증 약도 아직은 충분히 남아 그 역시 처방에서 뺐다. 인슐린 주사도 이번엔 1개만 처방받았다. 평소보다 약봉지가 가뿐했다.
집에 와서 타 온 약들을 죽 꺼내놓았다. 네임펜으로 약봉지에 날짜를 써넣기 위해서다.
할머니께서 약을 혼자 드셨을 땐 할머니 방 약서랍에 넣어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약에 관해서는 총총하신 분이셨기에 이건 무슨 약이고, 저건 무슨 약이고를 정확히 아셨고, 제 시간에 절대 실수 없이 꼬박꼬박 약을 찾아 드셨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총총함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약 드신 것을 잊기 시작하셨다. 조금 전 드신 걸 까먹고 또 드시기 일쑤였다. 당연히 약이 모자라기 시작했고, 혹여 과다복용에 대한 부작용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약을 관리했다. 그 날 드실 약을 할머니 침대 옆 협탁에 놔드렸다. 처음엔 그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치매가 조금씩 진행되면서 그마저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분명 약을 드셨는데 자꾸 안드셨다고 우기기 시작한 것이다. 쓰레기통에서 약봉지를 꺼내 보여드려도 이건 어제 먹은거라시며 화를 내셨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왜 생사람을 잡냐며, 안먹은 걸 먹었다고 거짓말을 한다며, 나를 바보 취급하는거냐며 펄펄 뛰셨다. 약을 안먹어서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시다며 드러누우셨다. 그래서 약봉지마다 날짜를 쓰기 시작했다. 두달치면 두달치 날짜를, 한달치면 한달치 날짜를…… 이렇게 날짜를 써놓으니 할머니도 더이상 우기지 못하셨다. 오늘 날짜의 약봉지를 쓰레기통에서 찾아 보여드리면, “분명 안먹은 거 같은데…..언제 먹었지?”하면서 잠잠해 지셨다. 이 맘때도 가끔 약 왜 안주냐고 성난 목소리로 부르실 때 마다 탐정처럼 쓰레기통에서 찾아 “여깄네, 오늘 약봉지~” 하고 수월하게 넘기곤 하니 번거로워도 꼭 날짜를 쓸 수 밖에 없었다.
날짜를 다 쓰고 나면 일주일치씩 뜯어 요일별 수납주머니에 하루 분량씩 넣어두었다. 매번 약봉지에서 각각의 약을 뜯어 드리는 것 보다 빠르고 간편했다. 아침에 할머니 아침식사를 하실 때 그 날 하루의 약을 꺼내어 아침약은 식탁에, 저녁약과 취침약은 할머니방에 놓아두었다. 할머니는 매번 “저녁약 어딨냐?”하고 물으시며 할머니 방문 앞까지 나오셨기에 저녁약은 할머니 방문 옆 미니냉장고 위에 올려놓았다.
“저녁약 어딨냐? 아, 여깄네~”
이 말을 들을 때 마다 풋~ 웃음이 나오곤 했다. ^^
매일 아침, 저녁마다 드시는 짜먹는 변비약과 어지러울 때 마다 드시는 어지럼증약, 눈 영양제와 안약, 감기약(감기약도 1년 내내 드셨다), 배 아플 때 드시는 약, 위장약, 각종 진통제 등은 할머니방 서랍마다 두고 할머니께서 그 때 그 때 알아서 드시게 했다. 진통제가 겹치는 것으로 병원과 상의를 해봤지만, 할머니의 약 의존을 꺾을 수는 없었다. 병원에선, 이 연세에 이정도면 엄청 건강하신 거라며, 우선은 본인 마음 편한 것이 가장 중요하니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면 원하시는대로 두시라 했다. 과연 할머니는 생각보다 건강하신 듯 했다. 약을 못먹어 문제는 됐어도, 약을 많이 먹어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니까.
“콧물 마르는 약은 없대? 콧물이 줄줄 흐르니 원 살 수가 없어!”
약 정리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며 할머니가 물으셨다. 식사를 하실 때 유독 맑은 콧물을 흘리신 지 꽤 되었다. 병원에 가서 진료도 해보았지만, 노인성 질환의 증상 중 하나일 뿐 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약도 소용 없고, 그냥 그러려니 하셔야 한다 하셨다.
“할머니, 콧물은 어쩔 수 업대요. 그냥 매번 푸셔.“
“늬미, 추저분스러워서 원 살 수가 있나……”
“에이~ 나는 아직 40댄데 벌써 콧물 흘리는데요 뭘. 할머닌 하얗고 예뻐서 아무도 추저분하게 안봐요.”
하얗고 예쁘단 칭찬에 할머니가 배시시 웃으셨다. 나이가 들어도 예쁜 건 좋은거다. 특히 우리 이입분여사님께는. ^^
마음같아선 불필요한 약들을 확 줄였음 좋겠지만, 할머니 몸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할머니 마음이 편하신 만큼의 약을 드셨음 했다. 할머니의 약 의존도가 낮아질 리는 없겠지만, 지금 드시는 약에서 더 늘지는 않았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입분씨는 한 줌의 약기운으로 하루를 살아냈다. 파란 하늘과, 산뜻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빛이 주는 기운도 모른 채, 아들과, 손주와, 증손주와, 며느리들이 주는 기운도 모른채. 그 기운들이 한 줌 약보다 더 보약이고 명약인 줄도 모른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