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한다는 것
병원이 아니면, '병사(病死)' 판정을 받기까지 경찰조사 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단다.
“혹시 아픈 분을 집에 방치해 둔 건 아닌가?”
그런 오해를 받을까 봐 걱정됐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불치병을 앓던 아흔 살 노부가 본인의 집에서 생을 마쳤을 때, 가족들이 실제로 겪은 일이었다.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90세에 돌아가셨으니 오래 사신 거고, 오랜 병환 끝에 떠나셨으니 호상(好喪) 일 테지만,
죽음은 여전히 가슴 아프고, 늘 갑작스럽다.
수술 이후 몇 주간 병원생활이 무척 힘드셨다고 한다.
답답해하시며 퇴원하셨고, 음식을 거의 못 드셨다.
그렇게 말라가며, 삶의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모습을 가족들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임종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하루 전 마지막 대화에서
친구는 아버지의 생명력이 꺼져가는 걸 느꼈다고 한다.
모두 아닌 척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결말을 향해 걷고 있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까?
친구 아버님은 전형적인 노환의 모습으로, 생명 에너지가 천천히 꺼지는 여정을 겪으셨다.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공간에서, 사랑하는 가족 곁에서 자연스럽게 마지막을 맞이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죽음이 꽤나 멋졌다고 생각했다.
언제가 되어야 할까.
나의 마지막 삶의 날은 언제쯤이면 좋을까.
지금으로선…
정신이 또렷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남아 있을 때.
그때, 나 스스로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꼭 노쇠해져 힘을 다 잃고서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준비된 순간에, 내 마지막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영화 Me Before You 속, 윌이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맞이하던 장면이
내겐 그 어떤 죽음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그게 너무 미숙한 생각일까?
어디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가.
사고사가 아니라면, 병원은 아니다.
마지막은 나의 공간, 내가 살아온 것들이 숨 쉬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내 물건들이 내 삶을 말해주는 그런 곳.
살아가는 곳을 스스로 고르듯,
죽을 공간을 정하는 것도 ‘나답게 사는 것’의 일부가 아닐까.
어떤 마음으로 이별의 인사를 하고 싶은가.
죽음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유산일까, 정리되지 않은 소지품들일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일지 모른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
죽음이 슬픈 건 남겨진 이들의 몫인 것 같다.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없는 세상에서 '죽음'이란 그리 힘든 일이
아닐지 모른다.
이제 장례식장에 가는 일은,
그저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는 일이 아니라
이 생의 마지막 챕터가 내게도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체감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간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준비할 나이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