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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를 읽고서

by 유랑행성

거의 반나절 만에 단숨에 읽은 에세이였다.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 애니메이션을 열 번도 넘게 보았다는 작가는, 삶의 굴곡마다 앤을 친구 삼아 함께 자라며 위로받아왔다고 말한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13년 동안 수많은 문학상에 응모하며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서른 즈음에 등단한 그는, 결국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작가의 삶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낭만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재능만으로 술술 써 내려가는 마법 같은 일도 아니다. 고단한 일상과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문장을 쥐어짜고, 마감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일의 연속이다.


그녀는 자신의 꿈이 이제는 생계가 된 현실 속에서, 다른 많은 생활인들처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덜 하기 위한 선택’이 되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 말속에서 단단한 삶의 태도와 애틋한 진심이 느껴졌다.


더 이상 열정과 긍정으로 반짝이는 앤을 주인공으로 감정을 이입하기보다 겉은 매정해 보여도 속정 깊은 마릴라 아주머니가 더 가까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작가는 단지 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앤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고. 같은 이야기도 삶의 위치와 시선, 감정의 깊이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다가오는지를 새삼 느꼈다.


책과의 첫 만남은 그저 가벼웠다. 여러 책 중 한 권을 무료로 고를 수 있는 기회였고, 빨간 하드커버에 앤의 이미지가 군데군데 그려진 책이 예뻐 보여 손에 들었다. 내용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앤을 좋아하는 친구가 떠올라, 그 친구를 위한 선물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 안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그동안 나는 앤을 단지 개성 넘치고 조숙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책 속에 인용된 그녀의 말들은 어느새 내 마음을 조용히 두드렸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

하셨어요. 하지만 나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것에 즐거움의 절반이 있는 거예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다리는 기쁨이란 건 온전히 나만의 것이니까요.”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앤의 대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단지 회고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여기, 우리들의 삶으로 이어진다. 사회의 변화와 가치의 흐름 속에서 작가는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일상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답을 더듬어간다.


마치 차를 앞에 두고 친구와 일상을 나누는 대화처럼.

앤의 말은 영화 속 인물로, 작가의 친구로, 또 독자인 나의 이야기로 번져간다. 그렇게 이 책은 하나의 에세이를 넘어 ‘일상을 나누는 시간’이 된다.


자기 계발서처럼 정답을 제시하지도 않고, 긍정과 노력만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답은 하나가 아니’라는 깨달음과, 나이 듦을 통해 얻은 여유와 포용이 글 곳곳에서 묻어난다.


책장을 덮고 나니, 마치 친구와 조용히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눈 듯한 따뜻한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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