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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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현대인들이 말하는 교양을 일종의 ‘색채 놀이’라고 했다. 현대인은 자신의 진솔한 얼굴이 드러날까 봐 온갖 교양들로 알록달록 가면을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눈 하나가 없거나 귀 하나가 없는 것은 불구도 아니다. 진짜 불구는 눈만 있거나 귀만 있는 사람이다? 무언가 한 가지 능력만 있는 사람들, 그래서 누구는 귀로, 누구는 입으로 알려졌으며, 누구는 눈으로, 누구는 다리로 전문가가 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한 가지 능력만 키우느라 여러 가지 능력을 퇴화시킨 것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들의 덕은 지배보다는 복종을 가르치고, 가치를 창조하는 자보다는 가치에 복종하는 자를 만들어낸다. 지혜와 관심을 가장한 말들은 자유롭게 비상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납덩어리이다. 경험, 관습, 도덕, 법률, 법칙 등 다양한 것들 속에 기거하면서 내 자유로운 비상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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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씨!
소설 속에서는 어떤 시시한 사건도 ‘그냥’ 일어나는 법이 없어.
하물며 웬만한 소설보다 더 오묘한 삶에서야 오죽하겠어.
올해는 내게 선물한 ‘안식년’이야.
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선택했을 거야.
내 무의식이 흐르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내가 멈춰버린 지점이 어디인지, 내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몰입의 시간이 필요했어.
내가 갇힌 틀에서 벗어나서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을 다르게 바라보고 싶었던 거지.
어떤 때가 되어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면, 바로 그 ‘때’가 온 거였어.
그동안은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돌아와야만 하는 ‘일탈’이 목적이었다면, 이번엔 익숙한 궤도를 이탈해서 새로운 삶으로 이동하는 ‘전환점’이나 ‘변곡점’이 필요했던 거야.
‘지금 여기’가 아니라 ‘어딘가 거기’로 넘어가야만 했어.
내 안의 ‘엄마’라는 그늘을 벗어나려 했나 봐.
들여다보니 그건 성차별적인 가족제도였어.
나조차 흠뻑 젖어 있었고, 말릴 새 없이 두 딸은 성인이 되었고.
마치 뫼비우스 띠나 클라인 병 같았어.
자르거나 깨거나 해야만 했지.
나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로 흠뻑 젖어있던 가부장제랄지 가족제도들을 다시 꺼내서 잘 빨아서 말리고 싶었어.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산속에 있을 때는 산이 보이지 않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보이잖아.
그걸 하고 싶었던 것 같아.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나 흘러 있어. 낼모레 오십이라니.
나를 알아차리느라 지나 보낸 세월에 만족해야겠지?
아니면 어쩌겠어, 인제 와서.
나머지는 내 딸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얘네들이 나보다 훨씬 낫거든. 진화가 잘됐어. 감사한 일이야.
‘결혼’이라는 내 인생의 커다란 숙제에서 내가 찾은 답은 ‘답이 없다’는 거야.
파랑새가 거기 있다는데, 거기에 없더라고.
그리고 이제는 필요 없어. 더는 찾지 않을 거야.
그냥 어디든 날아다니기로 했어.
니체 씨!
내가 그냥 ‘파랑새’ 하려고.
밥하고 빨래하는 건 싫지만, 내가 아무런 매력도 없을 리가 없잖아, 그치?
살림 못 하는 파랑새도 파랑새는 파랑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