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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영 Sep 23. 2016

사자가 못한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변신 이야기

***


“어린아이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도덕이나 법률, 제도는 아이의 행동을 심판할 수 없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을 뿐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없다. 그는 비도덕적 존재이다. 그것은 그가 약한 존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이 필요하지 않고 도덕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아이는 자기의 욕망에 따라 굴러가는 바퀴이다. 창조의 놀이에는 아이의 신선한 긍정이 필요하다. 아이에 이르러서야 정신은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인 자만이 자기 세계를 갖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기존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기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통한다. 새로운 사원을 건설하고 싶은 자는 낡은 사원을 부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삶을 조각하고 싶은 자는 낡은 삶을 지워낼 수밖에 없다. 긍정은 부정조차 긍정한다.”


***


니체 씨!


내가 여기 이 대목, 세 가지 변신 이야기에서 뻑이 갔어.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좀 이상한 변신 이야기 말이야.

그대가 말한 낙타는 결혼하기 전의 상태였다면, 사자는 결혼한 이후의 모습이었어.

내가 선택한 줄로만 알았던 ‘결혼’의 실체 앞에서 이전의 내가 와장창 부서졌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할 수밖에 없었거든.


내가 5녀 1남의 맏딸이야.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뭔 줄 알아? 

‘첫딸은 살림 밑천’이란 소리였어. 동생들을 위해서 뭔가 참고 희생하고 양보하고 모범을 보이는 그런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알아서 그냥 자동으로 착해진 거야. 그러면 무서운 아빠나 어른들한테 예쁘다고 칭찬을 엄청 받았거든. 그리고는 더 착해져야지 그랬지.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그래. 아니잖아. 나도 모르게 뭔가가 계속 쌓여갔던 거야.


억압된 상태로 불안과 초조함, 죄책감 같은 심리적 갈등이 이어졌겠지. 그래서였을까? 기절하길 잘했어.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도, 팔꿈치를 부딪쳐도, 손톱이 빠져도, 사랑니를 뽑다가도 아프면, 아니 아플 것 같으면 그냥 정신을 놓았어. 아빠가 나를 큰 소리로 불러도 놀래서 기절하고 그랬다니까. 나는 그런 내가 너무 싫었고, 어느 날부터인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사는 게 그냥 그랬어.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아무 의미도 없고 착한 척하기도 짜증 나고 아무한테나 말도 못 하겠고 다 귀찮고 집에서 마주치는 식구들이 꼴도 보기 싫었어.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고 자기 검열하면서 갈등만 키우고 있었던 거지. 그렇게 도망간 ‘결혼’이 어땠겠어. 나는 어쩔 줄 몰라서 죽을 것 같았어. 그런데 아이가 있는데 어떻게 죽어. 그때 TV 뉴스에서 아이를 죽이고 자살한 엄마 얘기 나오는데, 울어버렸잖아. 너무 이해가 돼서.


‘아빠’ 대신 ‘남편’이라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더라고. 남편이 알아서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그냥 조용히 얌전하게 아이를 키우면서 살았어. 나 스스로 삶을 ‘견뎌야 할’ 고통으로 만들어 놓고 ‘삶이란 고된 것이다’라는 말을 믿으면서 내 주변을 사막으로 만들고는 누군가 알아주겠지 하면서 나를 망가뜨리고 있던 거였어. 익숙하게 또, 모든 짐을 지고 묵묵히 걸어가리라, 했는데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 나는 그때 그런 나를 그냥 죽였던 것 같아.


낙타가 변신에 성공해서 사자가 되었다면, 더 이상 어떤 주인도 섬기려 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 맞아, 바로 그거였어. 더는 못 살겠다 싶어서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했더니 무슨 소리 하냐고 하더라고.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이미 맘이 정해졌으니까 고개를 돌렸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둘째가 뱃속에서 인사를 하네. 타이밍이란 게 참 무섭더라.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몇 번 더 있었지만 뭐, 난 이미 다른 나였으니까 ‘자유’를 향해서 날갯짓했지.


그런데 그대가 말한 사자 말이야. 그 사자처럼 나도 덜컥 걸려 넘어진 데가 있었어. 낙타처럼 삶을 사막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러고 나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몰랐던 거야.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많이 알고 있지 못했어. 자유를 찾아왔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몰랐던 거지. 그렇게 또 시간을 까먹으면서 나는 중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어. 나이가 준 선물이 뭔 줄 알아? 나를 기다릴 수 있게 된 거야. 나는 나를 믿고 기다려줬어. 아프지만 견딜 만하더라고.


니체 씨!

나도 언젠가 그대가 말한 그 ‘어린아이’처럼 살아볼 수 있을까?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자신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인 바로 그 ‘어린아이’ 말이야.

내 욕망에 따라 살아볼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어.

한 번쯤은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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