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다
이혼을 결정했다
고마운 일이다
후련하고 개운하다
오랫동안 묵혀 둔 숙제다
두 계절이 지나도록 지옥은 되풀이되었다
연락 없이 찾아오는 남편을 보면 사지가 덜덜 떨려서 주저앉았다
남편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다가오다가 놀라서 그만두곤 했다
수능이 끝났고 별거는 계속되었다
남편은 누구 좋은 일 시키냐며 절대로 이혼 못해준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가끔 들러서 짐을 챙겨가다가 한동안 집에 오지 않았다
그러던 남편이 동의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였을까?
진단서 때문이었을까?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으며 흘린 눈물은 미안함이었다
남편을 신고하고 고소해야만 하는 과정이 예의에서 벗어난다고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의 폭력은 결혼 생활을 돌아보게 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똑같으니 싸운 것이다
어른 흉내를 내는 어리석은 바보였다
남편의 잘못만도 나의 잘못만도 아니다
우리는 너무도 똑같아서 견뎠고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누구도 의지할 곳이 없으니 남편이라도 곁에 있어주길 바랐다
건강하지 않지만, 그래도 애들 아빠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있겠지, 하며 버텼다
나의 우울은 남편의 중독과 닿아있다
매일 술을 마셔대는 남편을 탓할 게 아니었다
폭력은 그 바닥인 셈이었고, 비로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건강하지 못한 파트너인 채로 20년이 넘도록 의지하며 살았다
아이들에게 아프게 상처를 준 잘못이 크다
내 부모도 비슷한 후회를 했을까?
내가 부모를 탓하듯 아이들도 그렇겠지
그저 건강한 어른이 되길 기도할 뿐이다
이제라도 잘못된 관계의 고리를 끊는다
내게는 이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새로운 시작이다
나는, 아이들은,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픈 걸 알았으니 잘 돌보고 안아줄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마흔 살이 넘도록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무지를 탓하고 반성한다
아니,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한 게으름과 나태를 인정한다
산다는 건 뭘까?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은 아니겠지?
내가 찾는 자유는, 사랑은, 존재하긴 하는 걸까?
어쩌면 이미 살고 있으면서 느끼지 못한 건 아니겠지?
이게 다는 아닐 거란 근거 없는 희망이 틀린 건 아니겠지?
네모난 삼각형이거나 모가 난 동그라미를 찾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더라도 가보고 찾아보고 확인하고 싶다
내가 찾는 그 뭔가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희망의 증거들을 하나씩 찾아보고 싶다
그 길에서 누구든 만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