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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ish Jul 01. 2018

인간의 미개함, <개들이 식사할 시간>

'매력' 아니고 '마력'있는 소설

개들이 식사할 시간


충격과 공포.
이 책은 나에게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제목이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라고 하여, 동물과 인간의 아름다운 우정과 교감을 기대했던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제목에 "인간의 친구", 개가 들어있다고 하여 생명 중시 현상하던가, 동물권에 대한 얘기일 것이라 예단한 내가 나빴다. 이 소설집은 그리 단순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이 책은 강지영 작가의 단편소설집으로 표제작인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 가장 책의 앞머리에 배치되어있다. 첫 작품을 읽고 "이게 뭐지…?" 싶었다. 결말까지 다 읽고도, 내가 방금 읽은 이 결말이 결말이 맞는지? 내가 결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내가 방금 뭘 읽은 거지? 
좋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나중에 평론가의 해설이나 서평 혹은 작가의 말을 찾아보면 될 일. 일단 넘어가자(확인해보니 제대로 읽은 것 맞다.) 글을 읽으면서 나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로테스크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괴기스럽고 잔혹하고 거칠다작가는 어떠한 포장도 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잔혹함을 써 내려갔다. 

사실 난, 징그럽거나 잔혹한 장면을 잘 견디지 못한다. 호러 영화를 원래 좋아하지 않지만 그나마 동양의 호러 영화가 서양의 호러 영화보다 견딜만한 것은 동양의 공포영화는 "귀신"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섬뜩할지언정 잔인하진 않다. 그러나 서양의 호러 영화에서 공포를 주는 주체는 귀신이 아니라 살인을 저지르거나 상해를 입히는 "사이코패스"이거나 육식동물의 본능에 충실한 "맹수"인 경우가 많다. 다리가 잘리고 살이 뜯기고 혈이 낭자하는 장면을 나는 잘 보지 못한다. 워낙 힘들어하다 보니 영화관에서 그런 장면이 나올 때면,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알아서 내 눈을 가려줄 정도이다. 그렇게 잔인한 것을 못 보는 내가 이 책을 완독했다 (나도 신기했다.) 완독을 가능하게 한 힘은 무엇일까?

이 책 속 작품 중 플롯에는 다소 판타지적인 요소가 섞여 있는 작품들이 몇 개 있었다. <눈물>이 그러했고, <스틸레토>가 그러했고, <사향나무 로맨스>가 그러했다. 작가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이야기 틀을 짜내 "인간의 탐욕"에 "비인간성"에 대해 말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나에게 자극을 준 작품은  <눈물>이었다. (차마 맘에 들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사고(thought)에 물 한 잔 뿌려 맞은 듯한 느낌을 맞았지만,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를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하고 공감하면서도 말이다)

시골 마을에 세눈박이로 태어난 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인어도 아니건만, 눈물을 흘릴 때만, 미간의 가운데에 있는 세 번 째 눈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름다운 빛을 가진 입자가 단단한 구"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다.

핏기 없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기가 넘게 울던 아기의 눈가에서 영롱한 눈물 몇 방울이 독배의 발치에 때깍때깍 떨어졌다. 젖은 눈에서 눈곱이 떨어졌을 리는 만무하여, 독배가 허리를 굽혀 방바닥을 구르는 작은 알갱이를 내려다보았다. 연한 황금빛이 도는 유백색 알갱이는 마치 덜 자란 진주 같기도 하고, 뭉쳐놓은 시금처럼도 보였다.  (중략) 가장 상품(上品)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인데 망치로 내리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데다 오팔처럼 여러 가지 색깔을 띤 작은 입자가 단단한 구(球) 안에 촘촘히 박혀 있어 부르는 게 값이었다. - <눈물> 中 - 

돌연변이인 아이에게 애정도 책임감도 없는 소녀의 어미인 향순과 향순의 오촌 당숙 내외는 소녀의 눈물을 팔아 앉은 자리에서 돈을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이 가족은 말 많은 작은 시골 동네라 "갑자기 부자가 된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마을 주민들에게 "소녀의 비밀"을 공개해버린다. 그리고 일정 부분 마을과 함께 수익을 공유하겠노라고 선포한다. 

"그 마을의 특산물인 보석을 생산하기 위해서"라는 소녀는 눈물을 흘려야만 한다. 소녀는 뺨을 맞고 꼬집히고 학대 당한다. 사람이 등이 따시고 배가 부르면 눈물 흘릴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녀를 굶기고 가둬놓고 감시한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소녀'를 염려하며 챙겨주는 이는 애꾸눈 할머니뿐이다. 눈이 하나뿐인 노인과 세 개인 어린 소녀. 보통에서 떨어진 두 존재만이 서로를 위해줄 뿐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의 탐욕"에 대해 생각해봤다. "돈"에 눈이 먼 어른들은 아이를 학대하여 눈물을 착취한다. 어린 생명에 가해지는 가혹한 행위들은 "눈물이 돈이 되기"때문일까 아님, 아이의 외견이 그들과 다른 세눈박이 돌연변이이기 때문일까? 어른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어떠한 죄의식도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약간의 환상성을 부여하여 "생각해 볼 거리"를 전하는 작가의 방식을 보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처음 읽었을 때가 떠올랐다. "상상력이 정말 기발하다. 세상에 이런 작가가 다 있네."라고 감탄하였고 그 책은 나로 하여금 문학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만들었다. 강지영 작가의 "개들이 식사할 시간"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그로테스크함은 강지영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정도가 더 심해지길래,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라는 마음이 생겼다. 어쩌면 그것이 완독을 가능하게 한 힘 중 하나일수도 있다.

내가 강지영 작가의 작품을 또 읽게 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나는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다. 이 느낌을 말로 표현할 길 없어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가도 "그래도 조심하시라" 경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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