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은 Sep 08. 2022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떡볶이




초등학교 일 학년, 학예회를 위해 내가 준비한 것은 동요와 창작 율동이었다. 제자리에 서서 팔 동작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율동은 율동이었다. 마트 음반/CD 코너에서 산 인기 동요 100선을 들어보면서 진지하게 선곡도 했다. 음 이탈이 나지 않을 만큼 적절한 멜로디, 율동을 만들기 좋은 노랫말. 엄마와의 상의 끝에 <파란 마음 하얀 마음>으로 결정되었다.


노래를 외우고, 가사에 충실한 율동을 짜고, 노래와 율동을 동시에 연습하기를 한참.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얼마나 신경을 쏟았는지 집에 와서 한 번, 간식 먹고 한 번, 책 읽다가 한 번, 저녁 먹고 한 번. 힘이 남아 있으면 두 번. 질리도록 연습했다. 그건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수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함도 있지만, 엄마에게 씩씩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극도로 소심한 성격의 나를 엄마는 걱정하고 있었다. 이젠 당당히 공연을 해냄으로써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학예회 당일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갔다. 미리 가서 앉아 있으니 긴장감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대신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엄마가 내 차례 때 못 오면 어쩌지? 실제로 엄마는 딸 셋의 공연을 봐야 했고 특히 내 공연을 보려면 첫째 언니 공연이 끝나자마자 우리 교실로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내 차례와 엄마를 기다렸고, 앞 순서 공연이 끝나갈 때쯤 뒤를 돌아보았다. 교실 뒤편은 북적였지만, 내겐 너무 허전했다. 결국 내 이름이 불렸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가 공연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긴장보다 큰 실망은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게 했다. 하지만 그 미미한 성취감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정작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은 보지 못했으니까. 착잡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누군가 속삭이듯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엄마는 차례가 지났냐고 물었고, 나는 풀이 죽은 채 끄덕였다. 알고 보니 첫째 언니가 공연 악보를 놓고 오는 바람에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 가져오느라 늦은 것이었다. 자연스레 공연 시간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고, 마치자마자 뛰어왔지만 내 공연은 끝난 뒤였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허탈했다. 이 공연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오직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이었는데, 엄마만 보지 못했다. 가만히 있다 끝나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담임 선생님께 다가갔다. 그리고 엄마가 보지 못해서 공연을 다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일순 놀란 듯했지만, 곧 알았다며 나를 들여보냈다. 잠시 후 선생님은 나를 다시 소개했고 나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앙코르 공연을 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떤 애는, 쟤는 왜 다시 하냐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실수 없이 공연을 끝내고 자리로 들어갔다. 엄마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학예회가 완전히 끝나고 엄마는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엄마의 감격한 얼굴. 주변에서도 저 얌전한 아이가 엄마 보여주겠다고 공연을 다시 한 거냐며, 다들 놀라고 감탄했다고 했다. 엄마의 칭찬을 잔뜩 들으며 집에 가는데 엄마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말하라고 했다. 나는 포장마차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날의 떡볶이는 내 생의 가장 용기 있는 결단에 대한 보상이었다. 나는 양념이 밴 쫄깃한 쌀떡을 꼭꼭 씹어 넘겼다.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사랑의 맛, 짜릿한 용기의 맛.  그 용기에서는 매콤달콤한 맛이 났다. 

이전 02화 마들렌, 마들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