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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May 31. 2022

미숫가루에 미치다




무더운 여름에 떠오르는 음식은 참 많고 많다. ‘여름철 별미’라는 이름으로 나열되는 갖가지 음식들은 기나긴 여름 동안 존재감을 자랑하며 우리의 입맛을 지켜 준다. 그러나, 가끔은 그조차도 먹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더위에 지치다 못해 식욕이 완전히 감퇴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굶을 수도 없는 일. 아무것도 먹기 싫을 때마다 내가 꺼내 드는 카드는 바로 미숫가루다.


미숫가루를 좋아한 지는 오래되었다. 어릴 적, 우리 집에 에어컨이 일절 없었던 시절 나는 팔다리에 차가운 물을 묻힌 채 선풍기 앞에 앉아 더위를 달래고 있었다. 나는 더위를 꽤 많이 타는 편이었기에 다들 괜찮다고 할 때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이스크림은 텁텁하고, 물은 써서 안 들어가는 상황에 이르면 나는 꼭 미숫가루를 타서 먹었다. 머그컵에 우유를 붓고, 숟가락으로 미숫가루를 푹 퍼서 휘휘 젓는다. 가루가 어느 정도 풀어지고 나면 꿀을 쭉 짜서 잘 섞는다. 마지막으로 얼음을 퐁당퐁당 넣어 주면 완성이다. 미숫가루가 시원해질 때까지만 얼음을 살짝 녹인 뒤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느껴지는 냉기는 순식간에 더위를 가라앉혀 주곤 했다.


컵에만 타 먹은 게 아니다. 옆면에 눈금이 있는 플라스틱 음료 쉐이커에 재료들을 몽땅 넣고 흔들어 마시기도 했고, 가족들 모두가 모여 나눠 먹으려고 비빔밥용 양푼에다 제조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양푼 미숫가루가 다 만들어지면 다 같이 숟가락으로 떠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만 생각하면 굳이 숟가락으로 저어 가며 만들고 먹을 때도 숟가락으로 떠먹은 게 참 비효율적이다 싶다.


믹서기를 이용해서 한가득 미숫가루를 만들고, 한 사람 한 사람 배분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마트 시식 코너의 미숫가루가 매우 훌륭한 목 넘김을 자랑하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뭔가 힘을 합쳐서 만들고 싶었던 건지, 수박화채 먹는 기분을 내고 싶었던 건지 잘은 모르겠다. 아무튼 그건 우리 가족만의 여름을 나는 한 방법이었다.


푹푹 찌는 주말의 한낮에, 얼른 먹고 싶어서 숟가락으로 가루를 꾹꾹 문질러 가며 미숫가루를 만들던 일곱 살은 어느새 하루에 (최소) 한 번, 유리컵 한 잔 가득 미숫가루를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사실 한 번으론 부족해 두 잔 마실 때도 허다하다. 워낙 자주 마시니 가족들은 내가 미숫가루를 젓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잘 먹네’, ‘미숫가루 진짜 좋아하는구나’ 같은 말들을 꼭 한다. 피에 미숫가루가 흐르는 게 아니냐는 농담도 들어본 적 있을 정도다. 그 정도로 무지하게 먹는 중이다.


하지만 나만 미숫가루를 즐겨 먹는 건 아니다. 하필 내가 타 먹을 때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 것일 뿐, 다른 가족들도 만만찮게 먹고 있다. 어제는 묵직하던 우유갑이 다음 날 아침엔 찰랑찰랑 가뿐하게 들리는 걸 보면 그렇다. 언제들 챙겨 먹는진 몰라도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지금 우리 집은 미숫가루 열풍이 제대로 불고 있으며, 적어도 여름이 가기까지는 계속될 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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