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운 좋은 실패

by 노란고구마


깜깜한 새벽녘 우도봉을 오르고 있다. 우도에서 보는 성산일출봉 너머로 떠오르는 해는 어느 작가도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이었다. 우도에서 일출을 보게 되다니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기에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아직 본섬이 아닌 우도에 있다. 어제 마지막 배를 놓쳤기 때문이다.


서빈백사의 에메랄드 빛 바다에 넋을 잃고 있다가 그만 시간을 잊었다. 마지막 배 시간까지 항구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여유를 부렸다. 항구에 다다라서 배가 떠나려는 것을 보고 선착장까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전력 질주 했지만 배는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멀어지는 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섬에 남겨졌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내 어이없는 실수에 헛웃음이 났다. 짐은 전부 본섬에 있고 당장 머물 곳조차 없다. 해는 지고 바닷바람은 점점 쌀쌀해진다. 후회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여행 중 실수를 하면 우선순위가 명확해진다. 얼른 수습을 하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워야 한다.


다행히 항구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빈자리가 있었다. 한숨 돌리고 나와서 해가 저무는 바다를 보았다. 고작 5분 늦었을 뿐인데 그 대가는 혹독했다. 예상치 못한 숙박비를 지불해야 했고, 이미 결제한 돌아가는 배값도 버렸고 내일의 계획도 전부 백지가 되었다.

어쩌다 이런 어리석은 실수를 했을까 되짚어 보는데 밤하늘에 별이 하나둘 뜨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드러나는 수평선과 끊임없이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자책하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이 밤바다를 보라고 배를 놓쳤나 보다 싶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빌린 자전거로 우도를 한 바퀴 돌았다. 관광객이 들어오기 전의 우도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어제는 전기자동차를 피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던 해안도로를 홀로 달리면서 상쾌한 바람을 마주했다. 곳곳에 제주마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어제는 보지 못했고 볼 수 없었던, 아침을 시작하는 자연의 소소한 일상이 눈에 들어왔다. 배를 놓친 덕분에 운 좋게 만난 풍경들이었다.


삶은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다. 언제든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이후의 대처다. 기회를 놓치면 모든 게 끝인 것 같지만, 멈춰 섰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길이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도 또 다른 길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공이라는 목적지까지 별일 없이 가는 것도 좋지만 실패하면서 접어든 새로운 길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진짜 실패는 후회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후회는 짧게 하고 발걸음은 계속 옮겨야 한다. 그러면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며 땀을 흘린 뒤 먹는 땅콩 아이스크림은 어제보다 배로 맛있었다.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달콤한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그 후로 실패를 마주하면 한편으로 기대감이 든다. 이번엔 또 어떤 새로운 길로 안내해 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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