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간절히 해준 이야기

지금 인생에서 중요한 것

by 이윤지


주말의 명화가 하는 날이면 엄마와 꼭 영화를 보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하던 날 엄마는
설레어하며 이 영화는 꼭 봐야 된다고 했다.
엄마의 학창 시절 추억을 들으면서
나도 어느새 클라크게이블의 팬이 되었다.

엄마의 영화 사랑은 한결같았다.
심지어 내가 시험공부를 할 때도 변함없었다.

"벤허는 꼭 봐야 돼!"

나는 지금 벤허고 뭐고 내일 시험이라 공부를 해야 된다고 했지만
엄마는 인생에서 중요한 건
당장 글자 한 자 더 외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엄마의 큰 기쁨은
나의 하루 일과를 듣는 것이었다.
엄마가 즐겁게 들어줄수록 나는 더 실감 나게 전달하는 이야기꾼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고서도
엄마는 사람들이 내 무대에 얼마나 환호해주었는지,
오늘 입고 간 옷의 반응은 어땠는지,
소개팅은 어땠는지,
내가 집에 오기만을 기다리며 신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엄마는 나랑 이야기 나누는 게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엄마는 소녀였다.

하루는 바쁜 일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뾰족구두의 아픔이 발 끝에서 요동치는 듯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만 싶었다.

해맑게 들어온 엄마는
오늘은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아무 말도 못 하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일 장거리 촬영을 갈 때 운전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힘든 게 싫어 괜찮다고 했다.
그냥 나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출발하기 전 갑자기 마음이 이상했던 나는
잠들어 있는 엄마에게 인사를 하며 한 번 더 이야기했다.

"엄마, 내가 엄마 힘들까 봐 쉬라고 혼자 다녀온다고 하는 거야. 알지?"

엄마는 활짝 웃으며 안다고 했다.


TV에서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보던 엄마는 처음으로
나에게 극장에 가자고 했다.
영화 베를린이 재미있어 보인다고 하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영화관 예매를 했다.

다음날 강의하는 학원으로부터 1:1 변호사 스피치 코칭 제안을 받았다.
개인 코칭은 꼭 해보고 싶었던 거였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좋은 기회다 싶어 바로 하겠다고 했다.

코칭 날짜를 받고 보니 엄마와 베를린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에게 문자 했다.
'엄마, 나 그날 일이 생겨서 영화 못 볼 거 같아. 다음에 꼭 보자.
근데 무슨 일인 줄 알아? 나 변호사 코칭하게 됐어!"

엄마는 잘 됐다고 했다.
나는 이 강의를 잘 마치고 엄마랑 영화도 얼른 봐야지 생각했다.



그날도 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학원에서 아나운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수업 중 전화가 왔다.
"119에요! 000 씨가 쓰러졌어요. 빨리 오세요."

"아! 네. 얼른 갈게요!"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런데 수업은 1시간 남았다.
어떡해야 하지?
우선 맡은 일이니까 이것까지만 하고 가야겠다.

정신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겨우 수업을 이어가는데
금세 전화벨이 또 울렸다.

"119에요. 안 오고 뭐해요! 심각하다니까요!"

그제서야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강사실로 가서
칠판에 쓰러질 듯 기대어 울면서 말했다.
저 지금 빨리 가야 할 것 같다고.

병원으로 가는 택시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
아저씨에게 제발 빨리 가달라고 했다.
병원에 가보니 엄마는 의식불명 상태였다.

우리는 한 번도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열흘 뒤 인사를 했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인생에서 지금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알아야 한다고.

엄마는 알고 있던 것 같다.
내가 진짜 중요한 순간을 놓치리란 것을.

그녀는 간절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정말 중요한 게 뭔지 꼭 잊고 살지 말라고.

그동안 얼마나 많이 놓쳐왔을까.

이제부터라도 진짜 중요한 거,
정말로 놓치지 않고 살고 싶다.

소중한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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