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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호텔 캘리포니아

by 이윤지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커다란 금성 전축이 있었다.

안으면 한 아름에 들어올 듯한 스피커와 빼곡했던 LP판, 카세트테이프, CD들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집 안에 항상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늘 음악을, 특히 올드팝을 들어왔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팝송을 좋아했다.




누군가 내게 “음악을 감상하기에 좋은 날은 언제일까요?” 하고 묻는다면

비가 내리는 날이라고 답하고 싶다.

라디오 DJ를 했을 때 확실히 빗소리가 들리는 날엔 신청곡과 사연이 더 많았다.

비구름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머금고 있다가 이따금씩 세상에 뿌려주는 건 아닐까 생각다.


비 내리는 날 단골 신청곡 중 하나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였다.

기타 선율이 시작되면 나도 모르게 크! 하며 감탄을 내뱉곤 했는데

이 곡을 들을 마다 떠오르는 나만의 사연이 있다.

YTN 이 서울역에 있던 시절 라디오 부스
진주 KBS에서 매일 진행하던 '시사매거진 진주투데이'




중학교 2학년 때 파바로티를 닮으신 음악 선생님이 있었다.

멀리서 걸어오실 때면 마치 무대에 오르는 테너 같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날 깜짝 공지를 하셨다.

다음 시간에 클래식 곡으로 퀴즈를 낸다는 것이었다.

한 문제만 맞히면 실기 점수로 최대 1점을 준다고 하셨다.

1점이면 그래도 의미 있는 점수였다.


집으로 오자마자 퀴즈 목록의 클래식들을 하나씩 들어보기 시작했다.

익숙한 멜로디도 있었고 처음 듣는 곡도 있었다.

우울하게 느껴지는 곡들은 얼른 다음으로 넘기기도 했다.


그러다 마음을 끄는 곡을 발견했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었는데 첫 소절이 흐르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눈앞에 사운드오브뮤직의 알프스 산맥이 그려지는 듯했다.

상상 속의 나는 마리아 선생님이 되어 두 팔 벌려 들판 위를 날아다녔고

양들은 음메에에 자유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계속 전원을 듣고 싶었던 나는 그냥 이 한 곡만 공략하기로 하고

반복 버튼을 눌러 꿈꾸는 밤을 보냈다.


다음날 음악 시간이 되었다.

수군수군 거리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대략 종합해보니,

여자 아이들은 아잉 몰라. 나 준비 하나도 못 했어. 발을 동동 구르는 분위기였다.

남자 아이들은 아예 관심 없다는 듯 벌써 엎드려 자는 친구들도 보였다.


어쨌거나 나는 전원만 공략하면 되는 거였다.

두근두근 음악 퀴즈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재생 버튼 위 선생님의 손가락 끝에 집중했다.


첫 번째 곡 큐!

아, 이건 모르겠다. 누군가가 맞추었다.


두 번째 큐!

음, 이거 굉장히 우아한 곡이었는데? 이것도 다른 친구가 맞추었다.


세네 번째쯤 재생 버튼이 눌러지자,

멀리서부터 양이 음메에에 풀 뜯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요! 이윤지! 베토벤의 전원!”


1점을 호기롭게 가져왔다.

어차피 1점이 얻을 수 있는 최대 점수인데 전원이 출제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이제는 감상자 모드로 전환하여 편안하게 앉아 퀴즈에 나오는 음악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몇 곡을 더 들려주시며 우리에게 1점씩 통 크게 선물한 음악 선생님은

마치기 전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다 끝났고, 끝으로 보너스 한 문제 더 나갈 거야.

참고로 이건 클래식은 아닌데, 이거 맞히면 누구든지 1점 더 준다!”


어랏, 무슨 말씀이지?

어버버 하는 중에 선생님께서는 바로 재생 버튼을 누르셨다.


“띵디리-”


아! 이 기타!

나의 반사신경은 고민할 틈도 없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저요! 이윤지!”


순간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음악이 나오긴 했어?’

‘글쎄? 뭐 좀 시작하나 했는데 쟤 모야?’


음악 선생님도 짐짓 당황하신 듯했다.

정답이 뭐냐고 물어보셨다.


“호텔 캘리포니아!”


나는 너무 흥분해서 넓은 음악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선생님 표정이 갑자기 환희로 바뀌었다.


“맞았어! 너 이거 어떻게 아냐? 근데 가수까지 맞혀야 돼! 너 가수도 알아?”


교실 분위기가 갑자기 생방송 퀴즈쇼로 변했다.

엎드려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고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응원해주었다.


“비틀스 아니야?”

“잘 좀 생각해 봐!”

“선생님! 윤지 전화 찬스 쓰면 안 돼요?”


맘 같아선 정말이지 엄마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싶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음악 선생님은 서둘러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지면서 온갖 팝가수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디스코를 추기 시작했다.


“5, 4, 3, 2”


그때!

갑자기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 한 마리가 섬광처럼 지나갔다.


“이글스! 선생님 이글스요 이글스!!!!”

“딩동댕동!!”

“우와아아아!!!!!”


마치 학교 대표로 골든벨을 울린 듯했다.

친구들 깡충 뛰며 함께 축하해 주었다.


끝나자마자 집으로 냅다 달려간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극적인 대서사 한 편을 실감 나는 목소리로 전했다.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오늘 획득한 2점의 공이 누구에게 있느냐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은 뱃속에서부터 올드팝을 즐겨 들어준 엄마에게 있노라! 하며 마무리를 장식했다.

엄마는 깔깔 웃으며 좋아하셨다.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에는 참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게 오래된 ‘올드’ 팝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당신에게도, 추억이 담긴 올드팝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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