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소리가 줄어든다. 장내가 어둑해진다. 관중들이 대화를 멈춘다. 고요한 침묵 속 "팍!" 하고 핀 조명이 켜진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나운서 이윤지입니다. 반갑습니다."
시선이 일동 집중된다. 두 다리를 깡으로 내딛고 항해의 여정을 마치면 수많은 박수와 환호성이 들려온다. 그 순간이 어찌나 황홀한지 처음 갈채를 받던 날 나는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 줄 알았다.
10년 방송을 하고 3년 간 전업주부로 지냈다. 시부모님 댁에 있던 어느 날이었다. 탈수를 마친 옷 뭉치를 끌어안고 빨랫대로 호다닥 달려가 옷을 널고 있었다. 그때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까지 TV 나오던 사람이 빨래 널고 있네. 그립지 않아?"
"아뇨 어머님. 저 지금 진짜 행복해요!"
지나치게 빠른 답변과 격앙된 목소리가 며느리의 연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진심이었다. 볕이 좋은 날 따사로운 햇살 아래 옷을 널면서 이 순간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끝을 모르는 경주마처럼 달릴 때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만 의미가 있고 그 자리만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조연이요 그러다 서서히 잊히는 거라 여겼다.
살다 보니 조명이 닿지 않는 삶의 현장이 진짜 무대였다. 찬란히 꽃 피우며 사랑받는 장미의 삶도 아름답다. 그렇지만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잠시 꽃 피우고 홀연히 떠나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흙에 씨앗을 심고 비바람을 견디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뒤 꺾이고 밟히면 힘내어 다시 피워내는 모든 여정이었다.
막이 내리는 쇼와 달리 삶이란 무대는 디엔드가 없다. 부끄럽고 어리석은 오늘에 눈물 흘리면 내일의 태양은 다시 한번 시작해보라며 조명을 밝혀준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꽃과 풀과 나무와, 지나가는 개미와 날아오는 참새와, 구름과 별도 있다.
어렸을 때 인상 깊게 읽은 글이 있다. 교과서에 수록된 이경희 작가의 '현이의 연극'이었다.
엄마는 연극에서 풀잎 역을 맡은 현이를 보러 간다. 휴일에도 연습하고 아침에도 분장을 한다며 일찍 나간 아이를 떠올리며 엄마는 아이가 주목받는 역할일 거라 생각한다. 아이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엄마는 문득 아까부터 배경으로 있던 숲속 풀잎들 가운데 현이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다닥다닥 붙어서 풀잎 그림판을 흔드는 아이들 속에서 엄마는 결국 현이를 찾지 못한다. 연극을 마치고 해맑게 달려온 아이는 엄마에게 잘 보았냐고 물어본다. 엄마는 어느 쪽에 앉아있었냐고 말을 돌려본다. 그러자 아이는 못 보았다면 다행이라며 기뻐한다. 참새 친구가 지나가면서 모자가 벗겨졌는데엄마가 이 모습을 보았을까봐 마음 졸였다는 것이다. 아이는 얼른 모자를 쓰고 풀잎을 흔들었다며 해맑게 웃는다.
나에게 이 연극의 주인공은 현이 이다. 실제로 무대가 펼쳐졌다면 아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관객들은 풀잎에 시선이 갔을 것이다. 진심은 전해지기 때문이다.
숲이 아름다운 이유는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해내는 수많은 풀잎과 나무와 꽃과 새들이 모여있기 때문은 아닐까?
똥을 치우고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담고 어질러진 장난감을 치우는 내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핀 조명받던 주연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가정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도움이 되어 훗날 남편과 아이가 잠시라도 주인공이 되는 날이 온다면 무척 행복할 것 같다.
강의도, 글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강의를 하고 글을 쓰는 순간에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 말을 건네는 듯하다. 그보다는 내가 전한 메시지가 좋은 영향이 되어 누군가가 주인공으로 빛나는 순간을 맞는데 도움이 된다면 더욱 값진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연이네 조연이네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주연이 엑스트라가 될 수도 있고 조연으로 살다가 주연이 되는 날도 있기 때문이다. 늘 조명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 생각한 누군가의 여정이 훗날 뜨겁게 조명받을 수도 있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내가 지금 맡은 일에 기쁘게 임하는 한, 태양이란 조명은 우리 모두를 힘차게 비추어줄 것이다.
PS) 제가 어렸을 적 인상깊게 읽었던 수필의 제목은 이경희 작가님의 '현이의 연극' 이었습니다.'핀 조명이 닿지 않는 곳' 원글에서는 아이의 역할이 풀잎이 아닌 나무라고 적어두었었는데요. 원작을 발견하고 그 역할이 풀잎 임을 알게 되어 해당 부분의 내용을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20년도 넘게 흐르니 조금씩 변형해서 기억되네요^^; 그래도 큰 틀은 제대로 기억하여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