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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숨을 쉬고 있나요?

나의 신앙 이야기

by 이윤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어떻게 모든 일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던 중 기도를 '호흡'하는 것으로 해석한

신애라 님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사람은 몇 분만 숨이 멈추어도 살 수 없다.

때문에 지금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기적이다.

허나 공기란 녀석이 늘 함께해주니 고마움을 모르게 된다.


불현듯 글을 쓰기로 마음 먹은 지난 3월,

‘삶의 소중함’ 이란 아래의 글을 첫 번 째로 작성했다.


그녀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찰나,
푸른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1초도 안 되었을 텐데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음소거되고
두 사람의 눈동자만이 남았다.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살고 싶어.’

사소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두려움이 손 내밀려 할 때,
별 것도 아닌 일에 몸과 마음이 움직이려 할 때,
나는 그녀의 눈빛을 떠올린다.

지금 살고 있는 1분 1초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단 하루를 살아간다면 어떤 일들로 채워갈까.
좋은 생각 이로운 행동만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쇳바퀴가 거친 소리를 내며 수술실로 들어가는 동안
의식 없던 엄마가 갑자기 눈을 떴다.
찰나의 순간 그녀는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살고 싶어.'

하나님께서는 왜
그 순간 엄마와 눈을 마주치게 하셨을까.


신혼여행 마지막 날 남편이 데려간 곳은 브루클린의 한 교회였다.
살아가면서 전도의 손길을 많이 받았지만 마음의 빗장이 열리지 않던 나였다.
그날 예고도 없이 방문한 그곳에서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홍콩에 사는 동안은 집 앞 교회를 거의 매일 갔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도 뿐인 상황들이 펼쳐졌고
아이를 품고 있던 중이라 더 간절한 마음으로 새벽 예배에 나갔다.
하루하루 다시 태어나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그 중 기억나는 하루가 있다.

주일에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남편이 보였다.
순간 왈칵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서 저기에 있다는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날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나중에 남편은 왜 이렇게 사연 많은 사람처럼 자꾸 우느냐고 했다.
차마 “살아 있는 게 감사해서 울었소.”란 말은 하지 못했다.

살면서 폭풍 잔소리를 듣거나 지독한 방귀 냄새를 맡을 때면

코털을 확 뽑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 날을 떠올려본다.


지금 이곳에 공기가 사라진다면?
나는 조금도 더 살지 못한다.

오늘 지구가 멸망해도 평소처럼 살아가겠소.
우아하게 끼적여보지만 막상 숨이 멈춘다고 생각하면 아쉬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사그락 거리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산책도 하고 싶고
찰싹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닷가도 거닐고 싶다.
당장 아이를 원에서 데려오며 손 잡아주고 싶고
퇴근하고 남편이 들어오면 왔어? 인사도 건네고 싶다.
전화를 걸어 가족들의 목소리만이라도 들어보고 싶다.


새벽에 눈이 일찍 떠져 강의 준비를 했다.
목소리를 낼 때 중요한 복식 호흡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숨이 쉬어지는 인체의 원리를 살펴보니
호흡이라는 것은 심장부터 우리의 마음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떨리면 심장 박동수부터 빨라지지 않는가.
반대로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다보면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해보았다.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구나.'
느낄 수 있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건
멈추지 않고 호흡하고 있다는 의미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숨 쉬는 덕에 지금 살아 있으니
이보다 감사하고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둥지를 틀려 할 때
나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떠올린다.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 순간들인지.

소중한 이들이 살아 숨쉬는 동안
부디 많이 웃고 행복 느끼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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