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이삿짐 싸는 일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 거 없는 줄 알았더니 11년 결혼 생활이 남긴 묵은 살림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삿날을 정한 직후부터 틈틈이 책과 옷을 정리하고 수납장의 안 쓰는 살림 도구들을 내다 버렸는데도 왜 이리 손댈 곳이 많이 남은 건지. 특히 베란다 한쪽 끝을 점령한 캠핑 장비를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짐이 많아도 포장이사를 하면 그나마 수월하다. 나도 물론 포장이사를 예약했다. 하지만 여느 이사와 다른 점은 집의 모든 가구와 물건을 다 옮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져갈 짐과 그냥 놔둬야 할 짐을 명확히 구분해 두어야만 이삿날 그의 짐과 내 짐이 뒤섞이는 혼란을 막을 수 있다.
택배 상자를 모아 옷과 살림 도구를 차곡차곡 담았다. 상자에 들어가지 않는 짐은 커다란 쇼핑백과 비닐봉투에 넣었다. 이사까지 남은 시간은 2주. 시간은 충분했으나 문제는 체력이었다. 서너 시간 짐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금방 피곤해졌다. 두툼한 면장갑을 벗지도 않고 먼지가 뒹구는 거실 바닥에 잠시 누웠다가 깜빡 잠들기도 했다. 피로가 쌓일수록 짐 상자도 늘어갔다. 거실 한쪽 벽 전체가 상자로 가려지는 걸 보면서 곧 다가올 이 공간과의 이별을 실감했다.
어느 아침, 남편이 출근 시간이 지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 오늘 출근 안 해?
- 몸이 안 좋아서 반차냈어.
그날 점심 무렵 출근한 남편은 12시가 다 되어 들어왔다. 간간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건강 체질이다. 아픈 모습이 낯설어서일까. 기침 소리가 거슬렸다. 잠귀가 어두워 웬만한 소음에도 잘 자는 나였지만, 게다가 알바와 강의와 이사 준비로 체력이 바닥나 침대에 등만 대면 잠에 빠져들었지만, 간헐적으로 들리는 콜록거리는 소리에 한참 몸을 뒤척였다. 방문을 닫고 싶어도 고양이들 때문에 그럴 수 없으니 그 밤은 꽤 괴로웠다. 그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술에 취한 채 늦게 들어와 기침을 했다.
이사를 일주일 앞둔 날, 강의가 없어 온종일 주방 수납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라면과 즉석밥 등 가공식품과 미역, 건표고 같은 마른 먹거리들을 나는 늘 여러 개 사서 쟁여두었다. 그래서 식재료를 넣어두는 서랍은 늘 빈 곳이 없었다. 그는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고 라면이나 캔도 거의 먹지 않으니 내가 먹든, 버리든, 가져가든 해야만 했다.
느긋하게 유통기한을 넘겨버린 크림소스 연어 통조림, 너무 매워서 먹지 못한 라면, 선물 받은 색색깔의 파스타... 버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동안 아까운 생각, 죄짓는 듯한 기분 때문에 처리하지 못한 것들이 계속 나왔다. 캔을 따고 봉지를 털어 묵은 것을 버리고 서랍을 비워가니 묘한 쾌감이 올라왔다. 어차피 못 먹을 거, 진작 이렇게 했더라면 지금 이 수고를 안 할 텐데. 미련 없이 버리고 후련하게 살걸.
오래된 것들을 들출 때마다 지난 기억도 함께 딸려왔다. 장면마다 그가 있기도, 없기도 했다. 어느 날엔 그가 있어서, 또 어느 날엔 그가 없어서 기쁘고 서운하고 시원하고 괴로웠던 순간들. 케케묵은 눅눅한 잔상이 뒤섞여 처음의 경쾌하던 손동작이 느려지고 몸도 무거워졌다.
어느새 서랍 마지막 칸만 남았다. 맨 아래 큼직한 국수 봉지를 들어내니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뭔가가 보였다. 제주메밀국수였다. 100퍼센트 메밀로 만든 맛있는 면이라 아껴두었던 기억이 그제야 생각났다. 어느 여름, 다가올 주말을 위해 작은 기쁨의 순간을 예약하며 설렜었지.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먹지 못했을 테고, 이후 일상에 덮여 국수의 존재를 차츰 잊었다. 그런 게 어디 이 메밀국수 뿐일까. 미래의 시간으로 던져두었던 무수한 계획과 약속들. 막연했으나 찬란하기도 했던 그 순간의 기억들이 여러 줄기의 분수처럼 요란하게 솟아올랐다가, 황홀할 새도 없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눈물이 툭 터졌다. 나는 남편의 기침 소리가 듣기 싫었던 게 아니다. 그가 이혼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날마다 이곳저곳이 비워지고 상자가 쌓여가는 어수선한 집안에서 어찌 마음이 편했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상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은 내 감정, 내 할 일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에게 향할 마음이 남아 있다면 굳이 지금 이 선택을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일주일만 참으면 되는데. 마지막까지 바닥에 남은 감정 따위 들키지 않고 지나가면 좋았을 것을.
다행히 남편은 곧 기력을 되찾았다. 며칠 후, 모처럼 일찍 들어온 그의 손에 참외 봉지가 들려 있었다. 모른 척하고 방에 들어와 책상을 정리했다.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던 그가 “참외 먹을래?”라며 말을 걸었다. 나가보니 싱크대에서 참외 껍질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 이제 껍질도 바로바로 치우네?
- 나 원래 잘 치웠어. 몰랐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는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 껍질을 벗긴 뽀얀 참외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투명한 유리그릇에 참외를 담아 그대로 냉장고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