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아름다운 그 글들

글 쓰고 말하는 일상

by 그냥

중학교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글쓰기’라고 하면 논술을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글쓰기를 지도한다. 지난주엔 인생 곡선을 그렸다. 살아오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일들과 그에 대한 감정을 종이 위에 점으로 찍어 선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15년 남짓 살아온 인생인데 뭐 그리 대단한 일을 겪었을까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아이들이 그린 스물다섯 개의 인생 곡선 중 평범하다고 할 만한 건 단 한 개도 없었다.


각자 그린 인생 곡선을 친구들에게 발표하도록 했다. 단,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그냥 힘든 일이 있었다” 정도의 설명만 덧붙이도록 했다. 아이들은 의외로 덤덤하고 솔직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왕따 경험, 성적과 외모에 관한 고민, 부모님의 불화로 인한 불안, 동생이 태어난 뒤 관심을 빼앗긴 슬픔, 맘에 드는 친구를 사귄 기쁨 등 저마다의 사연이 종이 위에서 출렁였다. 평소 쉽게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아이들은 서로에게 공감하며 신뢰감을 쌓는다.


속 깊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눈물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여자 몸무게가 50kg을 넘으면 안 된다면서 아빠가 밥을 안 줘요. 너무 힘들어요.” 한 아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은 아이가 “슬프다”라며 혼잣말을 했다. 나는 무엇이 슬픈지 물었다. “저도 초등학교 때 몸무게가 많이 나갔거든요. 부모님이 밥을 못 먹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못 먹었는데, 지금은 먹어도 살이 안 찌고 자꾸 말라서 이 모양이 됐잖아요.” ‘이 모양’이라는 건 또래 아이들보다 몸집이 작고 마른 자신의 체형을 말한다. “요즘은 너무 말라서 보기 싫대요.” 아이가 덧붙인 말에 울컥했다. 아... 존재를 거부당하는 이 아이들, 이 아픔을 어쩌면 좋을까. 그래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건 내면에 힘이 있기에 가능하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마주하는 이 순간이 그래서 소중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15분도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 느낀 점을 공책에 써보는 거예요. 남한테 보여주는 글 아니니까 마음에서 올라오는 말은 다 써도 좋아요.”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욕을 써도 되나요?” “뭔가 욕을 하고 싶은가 보네. 당연히 써도 되지요.” 아이들이 놀랐는지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마음속에 욕하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은 내가 있는데 왜 그 마음을 무시해야 하죠? 다른 사람한테 욕을 하는 건 안 되지만, 욕하고 싶은 마음을 나만 보는 글에 적는 건 나쁜 게 아니에요.” 아이들의 표정이 여느 때보다 진지하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한두 명이 필기도구를 챙길 뿐 아이들 대부분은 여전히 공책에 얼굴을 파묻은 채 빠르게 손목을 움직이고 있다. 한 아이가 교실을 나서며 말했다. “선생님, 시간이 너무 짧아요.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때 표현하지 못한 감정, 제대로 돌보지 못한 상처는 누구에게든 있다. 그것들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지는 걸 종종 경험한다. 솔직 한 글은 살아 숨 쉬고 움직여 마음의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그날 아이들이 써 내려간 글도 그들의 마음에 가 닿았을까. 열정적이고, 서툴고, 슬프고, 혼란스럽다가도 끝내 아름다웠을 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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