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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혜진 Dec 07. 2019

멸치와 깔끔히 헤어지다

30일 글쓰기

12월 6일 - 멸치와 깔끔히 헤어지다


3년 전, 나를 따라온 길고양이에게 멸치를 한 번 삶아서 준 뒤로 멸치육수를 낼 때마다 그 고양이가 생각났다. 그땐 고양이를 무서워할 때라 물 먹을 곳을 찾기 어려운 길냥이에게 짠 멸치를 주면 안 좋다는 정도만 겨우 알았다. 한동안 육수에서 건진 멸치를 냉동실에 모아두기도 했다. 버리긴 아깝고, 줄 만한 상황이 생기면 줘야지 싶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았다. 고양이가 다니는 길목에 내놓았다면 좋았겠지만, 고양이를 동네에서 쫓아내느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이웃들에게 찍히는 게 두려웠다.


축축한 멸치를 버리는 게 날이 갈수록 불편했다. 물에 불은 멸치들이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더는 멸치를 먹긴 어려웠다. 그러나 오랜 세월 멸치육수에 입맛이 길들어 다시마와 표고버섯 만으론 도무지 만족할만한 된장찌개를 끓일 수 없었다. 비 오는 날이면 애호박과 감자를 썰어 넣고 멸치국수 끓여 먹는 걸 좋아했는데, 그러자면 멸치를 두 주먹은 넣어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마음이 울렁울렁했다. 그 생명들을 어찌 또 버리나. 죄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지인이 대안으로 추천한 참치진국을 국에 넣어 먹었다. 아쉬운 대로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그러다 바로 며칠 전 조미료 생각이 났다. 음식솜씨 없는 엄마의 맛 없는 미역국이 어느 날 화려한 맛으로 둔갑했던, 30년도 더 된 그 날의 놀라움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고향의 맛' 조미료의 힘이었다. 조미료 안 쓰는 집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다가 MSG 유해성 논란으로 조미료는 한순간 저질 식재료 취급을 당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조미료를 산 적이 없었다. MSG가 소금만큼도 유해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생긴 기피증은 힘이 셌다.


엊그제 집에 오는 길, 마트의 조미료 매대 앞에 섰다. 새로운 조미료도 많고, 맹물에 소스만 풀면 부대찌개가 되고 된장찌개가 되는, 별놈의 양념과 소스가 다 있었다. 그래도 소고기가 들어간 건 사고 싶지 않았다. 소의 눈망울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여튼 조미료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통통한 병에 담긴 액상조미료가 눈에 띄었다. ‘OO해요~’라는 징그러운 광고 음악이 자동으로 떠올라 눈길이 더 갔을 거다. 성분표를 살펴보니 육류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심지어 국산콩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나의 비건 지향과 잘 맞았다. 액상조미료를 바구니에 넣었다.


오늘 생협에서 주문한 물품이 왔다. 콩나물을 꺼내 맹물에 넣고 불을 붙였다. 조미료 세 숟갈을 넣고 고춧가루도 한 숟갈 넣었다. 시금치를 다듬어 데치고 참기름과 소금, 조미료를 넣었다. 오래전, 엄마의 모든 음식에서는 뭔가 비슷한 맛이 났는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 아직 새 조미료의 독특한 맛을 내 혀가 감지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물론 그 옛날 엄마가 음식마다 '고향의 맛'을 과하게 때려 넣은 탓일 수도 있지만.


조미료를 넣고 휘리릭 끓여낸 콩나물국은 맛있었다. 기대보다 훨씬. 참기름과 소금만 넣어도 맛있을 제철 시금치나물에 감칠맛까지 더해졌으니 말해 뭐해. 생협 재료와 조미료의 조합도 허락할 만큼, 먹는 것에 대한 예민함을 많이 내려놓았다. 미치게 바빴던 올해 인스턴트 음식과 배달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날이 많았다. 빠르고 간단히 맛을 내는 조미료는 건강과 생존을 위한 타협이랄까. 조미료를 좀 쓰더라도 밖에서 사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멸치를 완전히 잊게 한 이 녀석. 내친 김에 인터넷에서 이 조미료를 활용한 레시피를 찾아봤다. 알리오올리오 파스타에 한 숟갈 넣어도 좋다 한다. 밥을 조금 덜 먹었더라면 바로 해서 먹어보는 건데. 배부른 게 아쉽다. 앞으로 오랫동안 내 밥상은 통통한 몸집의 너한테 좀 빌붙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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