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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혜진 Dec 12. 2019

키보드가 왔다

30일 글쓰기

12월 11일 – 키보드가 왔다    

 

내 기억에 올해처럼 바쁜 해가 없었다. 1년 전 이맘때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올해 한꺼번에 터졌다. 가장 큰 건 책이 두 권 나온 것이다. 또 초·중학교에서 ‘치유하는 글쓰기’ 7회·10회 강의를 세 번이나 했고 은유 작가님의 ‘감응의 글쓰기’ 수업에 보조강사로 참여했다. 운이 참 좋았다.     


새로운 일이 들이닥치니 기존 하던 일에 변화가 생겼다. 내 수입의 양대산맥이었던 기획사 일을 정리했고 (갑작스러운 취재 지시에 응하기가 어려워졌다), 여름휴가도 반납했다(딱히 반납할 회사가 없어 내가 나에게.). 무척 정신이 없었고,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느라 허덕였고, 매주 돌아오는 신문사 마감엔 몇 차례 펑크를 예약하기도 했다.     


지금도 마무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1월까진 이렇게 살아야 하고, 2월부턴 세 번째 책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흥청거려도 시원찮을 연말에 손목에 파스를 붙이고 자판을 치는 내 처지를 생각하니 뭔가 서글펐다. 몸도 지쳤고 생활이 팍팍하니 재미가 없었다. 뭔가 보상이 필요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큰 건을 마감하거나, 기분이 좋거나, 우울할 땐 치킨을 주문했다. 배달어플 주문 내역을 보니 3주마다 한 번은 치킨을 먹었다. 그런데 동물 사육에 대한 책을 읽고는, 내 즐거움을 닭 한 마리의 목숨을 없앤다는 게 너무 무자비하다고 생각했다. 치킨을 먹기가 부담스러워졌다. 치킨을 대체한 건 마트에서 파는 횟감용 연어였다. 한 마리를 여러 조각으로 나눠 놓아 아무래도 죄책감이 덜했다. 그런데 이것도 몇 번 먹으니 질려버렸다. 치킨도, 연어도 못 먹겠다. 아, 이제 난 무엇에서 재미를 찾을까.     


사실 나는 책과 먹을 것 이외엔 거의 돈을 쓰지 않는다. 필요에 의한 것 말고, 내 취향이나 소유욕을 위해 무언가를 사는 일이 거의 없다. 책과 음식 이외의 것을 사면 쓸데없는 돈을 썼다는 생각에 기분이 안 좋아진다. 타고났을지 모를 이 성향이 앞으로도 바뀌진 않겠지만, 올해만큼은 고생한 내게 뭔가 멋진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정말 좋은 선물이란, 내 돈을 주고 사기엔 사치스럽지만, 있으면 유용한 무언가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선물을 나에게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갖고 싶었지만 비싸다는 이유로, 대용품이 있다는 이유로 외면해왔던 것들을 떠올려봤다. 한 가지가 물망에 올랐다. 바로 기계식 키보드!     


나는 9000원짜리 플랫 키보드를 몇 년째 쓰고 있다. 자판을 치는 데 힘이 거의 들지 않아 손에 부담이 덜했다. 하도 오래 써 글자가 지워진 것도 모자라 자주 누르는 자판은 움푹 패이기까지 했다. 자판 사이에 이물질이 들어가 자판을 뒤집을 때마다 먼지가 쏟아져도 청소할 방법이 없어 늘 찝찝했다. 기계식 키보드는 자판을 하나하나 떼어내 먼지를 닦을 수 있다. 우연히 본 어떤 키보드가 참 환상적으로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비싸 아예 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저 ‘꿈의 키보드’였다. 그걸 나에게 사주기로 했다.     


11월 말, 과학책 최종 수정본을 출판사에 보낸 뒤 곧바로 키보드를 주문했다. 해외 배송이라 열흘에서 보름 후에나 받을 걸 알면서도 다음날부터 심심하면 배송조회를 눌렀다. 그리고 오늘 그 키보드를 받았다.     


긴장되고 설레는 맘으로 ‘언박싱’을 했다. 연한 아이보리색과 연파랑색 자판이 섞인 키보드. 스페이스바와 엔터키엔 파란 고래가 헤엄을 치고 있다. 처음 본 순간 내 맘을 사로잡은 그 고래다. 나와 한방을 쓰는 동거묘 미미를 생각해 저소음으로 골랐다. 자판을 누를 때마다 서걱서걱하는 소리가 매력적이다. 묵직하고 듬직하다. 자랑삼아 SNS에 올렸더니 다들 예쁘다고 한다. 기분이 좋았다. 신문사 편집장님의 “마감이 빨라지겠군요~” 이 댓글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키보드가 정말 맘에 든다. 자꾸만 자판을 치고 싶다. 그래도 너무 과했나, 싶은 생각이 자꾸 마음 한편에서 올라온다. 키보드값 20만 원. 적은 돈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정도 금액의 돈을 안 쓰고 산 것도 아니다. 20만 원은 얼마 전 내가 엄마네 집에 놔드린 온수 매트값이고, 공부하는 후배에게 찔러준 응원의 용돈보다 적은 돈이고, 엄마 여행가실 때 챙겨 드린 돈의 절반도 안 되며, 올해 들어간 코코 병원비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허영심에 산 사치품도,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과시욕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오직 내 것을 가져보는 경험이 마흔 중반에도 처음인 듯 어색하다.     


좋은 글쓰기 도구를 갖고 싶은 욕구, 깊은 바다를 헤엄치는 파란 고래에 투사한 낭만, 무엇보다 쉼 없이 달려온 노고에 대한 열두 달 치 보상. 불편한 마음을 밀어내고 싶어 굳이 부여한 키보드의 의미다. 내겐 책상이 치열한 작업 현장이니 컴퓨터와 부속품들은 내 노동 현장의 복지를 좌우한다. 그래, 내가 내게 베푼 복지, 이것도 의미에 추가.     


키보드 하나에 마음이 새로워졌다. 자판 곳곳에 물방울이 그려져 촉촉한 글이 써질 것 같다. 물욕은 무뎌짐과 싫증을 동반하고 또 다른 물욕을 끌고 오기 마련이다. 앞으로 이보다 안 좋은 키보드는 쓰기 힘들 테지. 새로운 자판에 마음을 두게 되는 그날이 아주 천천히, 천천히 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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