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의 기술

글쓰는 일상

by 그냥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숙제란 것이 생겼다. 낮에는 실컷 뛰어놀다가 밤이 되면 그제야 할 일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꾸물꾸물 책가방을 열었다. 엄마 아빠는 오밤중에 숙제를 한다며 나를 나무랐다.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스스로 과제를 한다는 건 어린 나에겐 낯설고 어쩌면 가혹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 학습을 지도해주기엔 부모의 배움과 지식이 짧았다. 낮에 책을 펴는 것도, 밤에 잔소리 듣는 것도 싫어서 숙제를 하지 않는 날이 점점 늘었다.


사실 숙제를 안 해도 선생님한테 혼나지 않을 방책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은 짝끼리 숙제 검사를 하도록 했다. 내 짝은 우리 반 최고 말썽꾸러기 서성진. 덧셈 뺄셈은커녕 한글도 제대로 못 읽으면서 수업 시간에 어찌나 자신있게 까부는지, 성진이는 수없이 지적을 받았다.


그 애와 처음 짝이 된 날, 내가 억지로 해 간 숙제를 그 애가 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손을 들고 그 사실을 선생님께 고했다. 선생님이 다가왔다. “손바닥 내라!” 휙, 딱! 허공을 매섭게 가르며 그 애 손바닥으로 떨어지던 회초리 소리. 손을 맞비비는 그 애의 빨간 얼굴과 울 듯한 표정이 마음에 남았다. 그 다음 숙제가 있던 날, 성진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따 숙제 검사할 때 우린 그냥 했다고 치자.” 성진이는 세상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나도 좋았다. 숙제를 안 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모범생 짝과는 누릴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공모의 쾌락을 처음 맛봤다.


이후로 숙제 때문에 몇 차례 벌을 서고 손바닥을 맞았다. 혼나도 그때뿐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이상하게 시험을 보면 점수가 잘 나왔다. 겉으론 얌전한 모범생, 실제론 숙제와 공부가 싫어 몸부림치는 밉상. 머리가 굵어지니 친구들 앞에서 혼나는 게 창피했다. 이제 어떻게든 숙제를 해야 했다. 난 중간중간 문제를 빼먹으며 대충 공책을 채웠다. 5학년 때 딱 한 번 걸렸을 뿐, 별 사고 없이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니 엄청난 숙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깜지. 매일 한 장씩 영어단어든 수학 문제든 빽빽하게 종이를 채워 담임에게 내야 했다. 다행히 나에겐 성실히 쓰면서 공부하는 언니가 있었다. 친한 친구에게는 선심 쓰듯 언니의 깜지를 나눠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은 훨씬 악랄한 방식으로 깜지 숙제를 내줬다. 자신이 도장을 찍어준 연습장에만 영어단어를 적어 내라는 거였다. 처음엔 열심히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공부 좀 해보자는 각오였다. 하지만 곧 지겨워졌다. 똑같은 방식의 공부법을 강요하는 것에 반항심도 따랐다. 어떻게든 깜지를 안 하고 싶었다.


‘그 도장만 있으면...’


선생님의 도장을 가질 수 있다면 언니의 깜지는 다시 내 것이 된다. 최대한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결심했다. 도장을 내 손으로 파기로! 영어 시간, 선생님이 돌아다니며 아이들 연습장에 도장을 찍었다. 내 노트에 도장이 찍히자마자 선생님 몰래 도장 자국에 지우개를 대고 손톱으로 살살 비벼 눌렀다. 잉크가 묻어났다. 자율학습 시간에 커터칼로 지우개를 조심스럽게 도려냈다. 획이 적은 첫 글자에 집중하고 복잡한 뒷글자는 윗부분만 대충 새긴 후 나머지 부분은 날려버렸다. 도장에 보라색 형광펜을 칠해 종이에 찍어보았다. “정말 똑같다!” 친구의 인증에 어깨가 쫙 펴졌다.


다음 날부터 언니의 연습장에 그 도장을 찍어 당당히 제출했다. 반 친구들도 영어단어가 잔뜩 적힌 종이를 몇 장씩 내게 내밀었다. 나는 비밀유지를 당부하며 도장을 찍어주었다. 고맙다는 말, 대단하다는 말에 뭐라도 된 듯 우쭐했다.


며칠 후, 잘 모르는 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복도를 오가며 몇 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는 아이였다. 그는 다 알고 왔다는 듯, 대뜸 내게 지우개 도장을 찍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게 입단속을 부탁했는데 누가 퍼트린 걸까. 날 모르는 아이들까지 도장의 존재를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도장이 집에 있다고 얼버무려 그 아이를 돌려보냈다.


자율학습 시간. 왜 이리 마음이 불안할까. 소문이 선생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왜 그랬냐 물으면 적당히 둘러댈 핑계가 있나? 없다. 나는 망신을 당하고 내 범생 이미지는 한순간에 날아가겠지. 친한 친구가 지나가듯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야, 이거 위조 아니냐?” 농담인 줄 알았는데 친구는 알고 있었구나. 이 허술한 도장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는 걸. 난 그저 하기 싫은 걸 안 하기 위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모면해왔을 뿐인데. 옳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이제 내 행동에 책임질 사람이 오직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무서웠다. 자존심만 높았지 과제를 할 성실함도, 혼이 날 배짱도 없는, 이게 나였던가. 내가 새긴 가짜 도장만큼이나 허접하고 찌질했다.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진짜 도장’이 찍힌 연습장에 영어단어를 써 보았다. 속도가 더디고 손목이 아팠다. 볼펜 두 자루를 쥐고 한 번에 두 줄씩 쓰는 연습을 했다. 억지로 해야 한다는 데에 약간 굴욕감이 들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어떤 앎은 내 안으로 들어와 차곡차곡 쌓이지만 어떤 앎은 평생 쌓아온 세계를 한 방에 무너뜨리며 온다.”(<그냥, 사람>(홍은전, 봄날의책) 204쪽)


열일곱 평생 야금야금 쌓아온 속임수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불쑥 찾아왔던 낯선 아이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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