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일상
내 책 <일상, 과학다반사>가 대만에서 출간될 거란 이야기를 듣고, 추가 원고를 보내겠다고 자청했다. 그래서 쓴 원고.
예류지질공원의 여왕머리
내 책이 대만에서 출간된다는 소식을 출판사로부터 처음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기쁨을 넘어 얼떨떨했다. 타국의 독자들에게 책을 선보일 기회를 갖는 것만으로도 감격할 일이지만, 그 타국이 대만이라서 더 기분이 좋았다. 대만은 내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나라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89년, 아빠는 대만으로 1년 기한의 일을 하러 떠났다. 국제전화요금이 아주 비싸던 시절이라 아빠는 한 달에 한두 번 편지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도 열심히 답장을 썼다.
어느날 아빠가 사진 몇 장을 편지와 함께 보내왔다. 바닷가에서 찍은 듯한 사진 속에는 사람 키보다 큰 돌기둥들이 땅 위에 여기저기 버섯처럼 솟아있었다. 그런데 그 돌기둥이 몹시 특이했다. 머리 부분은 거무스름하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몸통은 허리 부분이 잘록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모양의 돌기둥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정말 이런 곳 이 세상에 존재할까. 사진 속 장소가 안드로메다은하의 행성처럼 기이하게 느껴졌다. 예류지질공원. 언젠가 나는 그곳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다.
바위 모양에 대한 궁금증은 중학교에서 침식과 암석의 변화에 대해 배우면서 어렴풋이 해소되었다. 침식은 지표면의 바위나 돌, 흙 등이 물이나 바람 등에 의해 깎이거나 녹아 그 잔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말한다. 빗물에 바위가 조금씩 패이거나 강이 흐르면서 자갈의 표면을 둥글게 만들거나 빙하의 이동으로 땅이 깎이는 모든 변화가 침식과 관련이 깊다. 때론 공기나 햇빛, 산성비 등에 의해 암석이 풍화되기도 한다. 깎이고 잘게 부서진 알갱이들은 동식물의 잔해와 함께 어딘가에 쌓이게 마련이다. 그것이 단단하게 다져지면 다시 암석이 되고 그 암석을 퇴적암이라 부른다. 침식-퇴적과 관계없이, 마그마가 식어 굳은 화성암, 화성암과 퇴적암이 높은 열과 압력에 의해 성질이 변한 변성암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깎이고 변하고 어딘가로 이동한다.
내가 신비롭게 여긴 예류지질공원의 버섯 바위들도 처음부터 그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바닷속의 퇴적암이었다고 한다. 수천 년 전 땅속 깊은 곳의 거대한 힘이 지각 변동을 일으켜 바닷속 지반을 해수면 위로 밀어 올렸다. 뭍으로 나온 퇴적암 지대는 즉시 풍화와 침식이 시작됐다. 그런데 버섯바위의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고르게 깎이지 않고 오히려 뚜렷하게 구분되는 이유는 퇴적암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머리 부분은 석회질 사암(calcareous sandstone)으로 몸통 부분의 황토색 사암(ocher-yellow sandstone)보다 단단하다. 그래서 몸통에 비해 덜 침식된다. 그 결과 큼지막한 머리에 가느다란 몸통의 돌기둥이 된 것이다. 이렇게 어떤 암석 위에 더 단단한 암석층이 쌓여 독특한 모양으로 침식된 돌기둥을 후두스(Hoodoos)라고 부른다.
예류의 돌기둥 가운데 ‘여왕머리’라 부르는 바위가 가장 인기가 많다고 한다. 사진으로 봐도 얇은 목선과 우아하게 올린 머리 모양이 정말 고귀한 여왕의 옆모습과 똑 닮았다. 그곳에 다녀온 지인의 이야기론, 이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꽤 오래 줄을 서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왕의 목 부분이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뉴스(Taiwan News)가 2017년 7월 18일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국립대만대학 연구팀의 조사 결과 여왕머리의 목이 점점 얇아져 앞으로 5년에서 10년 뒤에는 부러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어려서부터 궁금했던 그곳에 아직 가 보지 못했는데, 그 사이 여왕머리의 목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혹시 해결책이 나왔는지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반나절 동안 내가 찾은 건, 인위적인 대책을 억지로 마련하는 대신 당분간 자연의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자연의 흐름’이라는 말에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여왕머리가 쓰러지지 않게 할 방법은 꽤 많을 것이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전시하듯 투명한 구조물을 만들어 바위를 덮어씌울 수도 있고, 침식을 더디게 하는 물질로 표면을 화학 처리하거나 보정물을 덧댈 수도 있다. 이런 쉬운 선택을 남겨둔 채 그저 자연의 흐름에 맡기기로 한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란 말인가.
나는 인간의 무모함과 이기심에 절망하다가도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작은 희망을 느낀다. 자연의 흐름을 역행하면서까지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인간의 욕심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과학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라는 말이 있다. 앞으로 과학 기술은 자연의 법칙과 우주의 질서를 최대한 발견해 인간에 의해 틀어진 많은 것들을 바로 잡는 일에 쓰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왕머리에 대해 ‘자연의 흐름’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한다 해도 나는 그것을 존중할 마음이 있다. 분명 많은 고민 끝에 내린 최선의 선택일 게 분명하니까.
언제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곳, 대만. 코로나 상황이 마무리되면 곧 대만행 비행기표를 예매할까 한다. 타이베이 시내의 서점에서 한자로 번역된 내 책을 한 권 산 후, 아빠가 사진을 찍었던 버섯바위 앞에서 나도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고 싶다. 설사 여왕머리가 지금의 모습과 달라졌다 해도, 그것이 자연의 순리임을 기억할 것이다. 아마 하늘에 계신 아빠도 이런 날 흐뭇하게 바라보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