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파랑 Oct 22. 2023

프롤로그_오래 전 일기를 펼치다

아빠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2008. 6. 18. 수. 비 옴

아빠가 돌아가신 지 9일 된다. 아빠가 일요일에 돌아가신 건지 월요일에 돌아가신 건지... 모른다. 상을 치르는 동안 많은 분이 다녀가셨다. 아빠의 마지막 손님. 아빠의 직접 사인 심근경색, 중간 선행 사인 고혈압, 선행사인 뇌졸중. 하지만 우리의 판단은 ‘당뇨 합병증’이다. 아빠는 끝까지 ‘뇌병변장애’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에 그렇게 쓰여 있다. “어쩔 수 없다”고. 난 다시 심리학책을 사서 읽는다. 다시 침체기다. 이런 나를 그냥 내버려 둔다.



지난 6월 아빠 기일을 맞아 오랜만에 엄마와 삼남매가 모였다. 나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아빠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언니와 남동생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이 없다. 순간적으로 깊어지는 눈빛을 나는 보았다.


- 언젠가 늬 아빠가 그러더라고. 자식들한테는 최선을 다했다고.


옆에서 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진 15년. 마흔다섯 살의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아빠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없는 세상이라면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나는 전혀 기쁘지도, 그의 죽음이 반갑지도 않았다. 내가 아는 그라면 이렇게 곱게 떠날 리 없다. 몇 번은 더 난리를 쳤어야 하지 않나?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그의 쓸쓸한 죽음이 슬펐고, 이제 그 무엇도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 허망했다.     

그의 죽음에 나는 왜 이리 힘든가. 그를 미워한 게 아니었나. 그는 왜 자신의 안부를 묻는 자식들에게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는 어쩌다 내 예상과 다른 결말을 맞이했나. 내가 아는 그는 어쩌면 그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는 누구였을까. 그에 대해 내가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15년이 흐른 지금, 그토록 바랐던 소소한 고민이 깃든 일상을 산다. 가을볕에 뒹구는 고양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나를 뒤흔들던 불안과 어지러운 감정에서 벗어난 평온을 진하게 누린다. 그러나 이따금 저 밑바닥에서 그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올라온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글 쓰기 수업 수강생의 글 속에서, 식구들과의 일상에서 얼음 결정 같은 차가운 조각들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내 안에서 자꾸 부딪힌다. 나는 얼어붙고 때론 활활 타오른다.


아빠라는 사람과 내가 만든 조각들. 사랑과 증오와 분노와 투사와 연민이 뒤섞인 그 조각들이 자아내는 빛과 무늬를 바라본다.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그인가. 그는 왜 그런 모습으로 살다 떠났을까. 나는 왜 아빠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을까.


1950년에 태어나 2008년 사망한 나의 아빠와 1978년생 그의 둘째 딸 이야기를 더 늦기 전에 꺼내보고 싶다. 다행히 내겐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써 온 일기장이 한 무더기나 있다. 일기장을 지도 삼아 그와 나의 퍼즐을 맞춰 볼 생각이다. 그래야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써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