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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파랑 Oct 22. 2023

첫 일기

1985년 3월 30일 날씨 맑음 토요일
내일 모래가 군항제이다. 잘 때마추어 벗꽃이 피었다. 참 아름다웠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다. 돈을 군항제 때 다 써버리면 아빠의 생일 선물을 못 드릴 것이다. 아빠의 생신이 4월 15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금을 많이 하면 될 것이다



이 일기는 내게 남아 있는 것 중 글 형식으로 된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여덟 살이었다. 다음날 일기 아래에 빨간 색연필로 ‘검’이라고 적힌 걸 보면 이 일기는 숙제였던 게 분명하다. 지우개로 지운 자국이 여러 군데 있고, 글씨도 꽤 정성스럽게 썼다. 내용이 제법 구체적이고 짧은 글 안에 기승전결과 (교훈적인) 메시지도 담겨 있다. 한 번도 자기 서사를 써 본 적 없는 여덟 살 아이가 곧 열릴 지역 행사와 아빠의 생신을 연결해 글을 쓴다? 이거 정말 타고난 작가적 재능 아닌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38년 전 그날의 일이 기억날 리 없지만, 이쯤에서 온갖 촉을 발휘해 추리를 해본다. 나는 숙제를 성실히 하는 편이 아니었다. 늘 잠자기 직전에야 숙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고, 내일 선생님에게 혼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겨우 숙제장을 펼쳤다. 엄마와 아빠는 이런 나를 무척 많이 나무랐다. 양육자들은 대개 아이들을 재워야 그날의 일이 끝난다고 생각하곤 한다. 또 어쩌면 자야 할 시간에 숙제를 하려는 딸래미의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한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내 습관이 낮에 미리미리 숙제를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부모님 눈치를 살피다가 그냥 숙제를 안 하는 걸 택했다. 선생님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래저래 편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기 숙제는 여느 것과는 달랐을 거다. 일기란 날마다 쓰는 것. 도시락과 실내화 주머니를 늘 챙겨야 하는 것처럼 적어도 학년이 끝날 때까지는 일기 숙제가 주어질 거라는 걸, 어쨌든 일기장이라는 걸 만들어 그곳에 구구단이 아닌 뭔가를 써야 한다는 걸 내가 몰랐을 리 없다.     


일요일 밤. 나는 일기 숙제를 기억해 내고 엄마에게 말한다.     


- 엄마, 선생님이 일기장에 일기 써오래요.     


아마도 이렇게.     


엄마는 고집스럽게 말 안 듣는 나에게 화가 나서 한참을 소리 지른다.     


- 너 그걸 왜 또 이제야 말해! 이 밤중에 일기장을 어디서 사!


 아마도 이렇게.     


그리고 4학년인 ‘똑똑한’ 언니와 이야기한다. 언니가 제 서랍에서 새 일기장 하나를 꺼낸다. 친한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이후 일기에 써놓았)다.     


- 엄마, 여기 일기장 있어요.     


바닥에 엎드려 일기장을 펼친다. 무엇을 써야 하나. 암담하다. 언니와 엄마가 이런 나를 지켜본다. 엄마는 언니에게 도와주라고 명령한다. 언니는 인상을 쓰며 내 옆으로 온다. 언니가 내용을 불러준다. 일기장의 지우개 자국과 또박또박 쓴 글자들은 언니와 엄마의 코칭의 흔적이다. 어쩌면 엄마에게 몇 번 쥐어 박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 일이란 정말 모른다. 내가 썼지만 내가 쓴 게 아니기도 한 이 하루의 일기 속에, 중년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키워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군항제가 열리는 경남 진해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그곳의 벚꽃은 아름다움과 위로의 세계를 열어주었으며, 아빠는 크고도 거대한... 걱정이었다. 벚꽃의 환한 빛을 단숨에 삼켜버리고 내 정서에 다채로운 그늘을 드리운 어둠과도 같은 사람. 그러나 삶의 많은 부분을 아빠라는 사람과 그의 능력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내게, 그는 내 존재의 크기와 무게와 단단함과 뻗어갈 뱡향을 좌우하는 커다란 세계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세계 안팎에서 자랐으나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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