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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파랑 Oct 22. 2023

아빠와 군항제


(1985년) 4월 1일 월요일 날씨 맑음     
오늘부터 군항제이다. 오늘 아빠와 동생이 군항제에 가셨다. 나도 아빠와 함께 가려고 했었는데 동생이 우는 바람에 나대신 동생이 갔다. 나는 언니와 엄마가 함께 갈려고 했는데 너무 언니가 늦게 와서 그만 못 갔다.



회사에서 3교대로 일하던 아빠가 날이 환한 오후에 퇴근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어딜 가야 한다며 엄마를 재촉한다. 활기와 기대와 조급함이 뒤섞여 들뜬 아빠의 표정. 엄마는 갑작스러운 아빠의 제안에 짜증이 난 것 같다.      

- 지금 못 가지! 혜숙이도 아직 안 왔는데.     

엄마는 단호하다. 그러자 아빠가 내게 말한다.     

- 혜진아. 아빠랑 같이 군항제 가자.     

이날은 군항제 개막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빠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에 흥미가 많았다. 무엇이든 직접 보고 느끼고 참여하기를 원했다. 즉흥적이고 급하기까지 했다. 아빠의 제안에, 아빠의 성향을 가장 많이 닮은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게다가 아빠와 둘만의 외출이라니. 이건 여덟 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다! 나는 두세 살 터울인 언니, 남동생과 늘 함께였으니 적어도 당시 기억으론 그랬다.     

이날 유난히 신이 났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불필요하게 끼어 있는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다. 똑똑하고 야무진 언니와 순둥하고 귀한 남자아이 사이에서 나는 고집 강하고 드세고 유별나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가장 빛나야 할 유년기를 가장 힘들었다고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다.     

아무튼 그날 나는 작업복을 벗고 드물게 와이셔츠를 걸친 채 유난히 신이 나 보이던 아빠와 군항제 개막식에 가게 되었다. 시내까지는 버스로 20분. 차비를 챙겨 주머니에 넣고 대문을 막 나섰을 때였다. 아주 큰 울음소리가 집 담장을 넘어 날아왔다. 당시 우리 가족은 꽤 너른 마당이 있는 집의 서쪽에 붙은 단칸 셋방에 살았다. 그 셋방에서 엄마와 둘이 남아 있던 동생이 자신도 따라가겠다며 울음을 터트린 거였다.     

아빠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봤다. 미소를 띤 채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 아이쿠, 혜진아. 혜민이가 울어서 안 되겠다.     

이 장면을 끝으로 담장 옆에서 내 기억은 멈춘다. 울고 싶은 기분이 그 시각 이후의 사건을 덮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감정만큼은 생생히 남아 있다. 폭죽처럼 하늘로 날아 올라가던 기대감이 저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간 듯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서운하고 섭섭했다. 나도 동생처럼 큰 소리로 울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나는 울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잘 울지 않았다.     

끊기고 사라진 기억을 일기장이 채워준다. 4학년이었던 언니가 늦게 오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는 건 어쩌면 반만 맞는 말인지 모른다. 엄마는 아마도 군항제에 갈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을 거다. 시내에 나갈 때면 엄마는 화장을 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드라이를 해야 한다. 아이 셋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람 많은 행사장을 버스로 오간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엄마에겐 우리에게 저녁을 먹여야 할 임무가 있었고, 다음 날 아침이면 도시락을 싸 학교에 보내야 했다. 월요일을 소란스럽고 피곤하게 보내고 싶지 않은 엄마의 가차 없는 선택.     

날이 저물고 아빠와 동생이 집에 돌아온 밤. 방바닥에 엎드려 일기장을 펼친다. 가족에게는 서운한 감정을 가지면 안 된다고 여긴 탓일까. 아쉽게도 아쉬운 감정까지 솔직히 쓰지는 못했다. 이후의 일기에도 무수한 사건과 감정들을 엉뚱한 문장들로 뒤덮어 숨겨 놓곤 했다. 나는 숨은 그림을 찾거나 암호를 해독하는 마음으로 일기 속 단어와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과거의 이 아이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날의 진실에 다가서는 마음으로.     

그래. 어쩌면 이날 한 자 한 자 글자를 눌러쓰는 동안,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실을 적는 것만으로도 울고 싶은 마음과 억울함이 살짝 풀리는 기분. 그리고 언젠가 이런 나를 누군가 발견해 주길 바라는 기대감 같은 것. 그럼 나는 지금, 미래의 어느 날로 막연하게 예약해 둔 위로의 시간을 드디어 마주하는 중인 걸까. 그날 미처 쏟아내지 못했던 오래된 응석을 받아 든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 앞으로 일기를 계속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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