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제발 잔소리 좀 그만해.”
“엄마가 뭘 그렇게 잔소리를 했다고 그래!”
“그게 잔소리지 왜 잔소리가 아니야!”
“엄마가 하는 소리를 왜 잔소리로 들어!”
“난 듣기 싫다고! 싫다고!”
“악! 악! 악!”
독립이라는 자각이 시작된 건 어디서부터였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3년 전 일이 떠오른다. 엄마랑 대판 싸웠다. 대화만 보면 그렇게 감정이 격해질 일이 아닌데 아주 피철철 흐르는 전쟁을 치렀다. 겉으론 평온해 보이는 꽃밭을 거닐듯 지냈지만 정작 마음엔 서로가 아주 큰 대왕벌집을 짓고 살았다. 한 집에 살았지만 대화도 많이 없었고 대화뿐이라고는 첫째 육아에 대한 이야기 혹은 잔소리가 전부였다. ‘정리해라-’ ‘돈 좀 아껴 써라- ’ 등의 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변함없는 잔소리들. ‘알았어-’라고 했지만 속에선 ‘제발 그만 좀 해’라고 외쳐댔다. 엄마의 잔소리에만 자동으로 눌리는 ‘화’ 스위치가 내 몸 어딘가 장착되어 있는 거 같았다. 말 못 하고 속으로 삭이고 삭였다. 엄마도 비단 마찬가지였겠지. 결혼은 했지만 결혼 후에도 그대로인 것 같은 딸. 서로에 대한 앙금이 쌓일 대로 쌓이고 곪을 대로 곪아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엄마는 비명을 지르듯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냥 할 말을 했을 뿐인데 저렇게 소리를 지르나. 그동안 말 한 번 제대로 안 하다가 표현을 해야겠다 싶어 용기 냈는데 그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그렇게까지 반응했어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어 그동안 엄마에게 섭섭했던 일들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떠올랐다.
첫째를 낳고 같이 살면서 ‘힘들지?’ 란 따뜻한 위로 대신 ‘애 좀 잘 봐라-’ ‘왜 애를 울리냐-’ ‘기응환을 먹여봐라-’ 등의 잔소리만 귀가 닳도록 들었다. 나도 엄마가 처음인데 경험했던 엄마는 더 내 마음을 잘 알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서운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몰고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안했다. 엄마가 신경 쓰였다. ‘설마 아니겠지? 이런 일로 엄마가 죽을 생각을 하겠어?’ 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차를 돌려 집으로 갔다. 집에 가니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잠시 뒤 화장실에서 기척이 들렸다. ‘다행이다-’ 잠시 뒤 두 눈이 벌게져 나온 엄마가 나타났다. 그리고 어디론가 나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가?’ 물음에 답도 없이. 엄마가 나간 현관문을 몇 분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마침표 없이, 성과 없이 현관문 소리와 싸늘한 공기만 남았다.
바로 다음날, 내 생일이었다. 남편과 나, 그리고 엄마는 괜찮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싸운 다음날 같이 마주하고 식사를 하는 멋쩍음이란. 식사를 하며 분위기 전환이 되기를 바랐는데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방에 없더라.”
“응응. 잠깐 나갔다 왔어. 엄마는?”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왔어.”
“...”
“엄마는 어제 정말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어.”
“!”
불안했던 예감이 꼭 맞았다. 엄마는 실행하지 못했을 뿐, 마음은 이미 아파트 아래에 가 있었다.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을 이기기 어려웠지만, 동시에 서운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오늘은 내 생일 아닌가. 생일 맞은 딸에게 너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말을 해야 하는 건가. 내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엄마는 영영 모르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엄마에게 난 아이였다. 한 아이의 엄마인 내가 엄마에겐 잔소리를 퍼붓지 않으면 안 될 아이로 보인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 말을 직접 했어야 했다. 그때는 왜 생각나지 않았을까. 왜 마음속에서 화만 올라왔을까. 만약 엄마가 그날 29층에서 뛰어내렸다면 난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았겠지. 그러면서도 평생 엄마를 원망했을 것 같다. 천만다행으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 마음을 쓸어내렸지만 그날 식사 이후 우리가 함께 사는 게 더 이상 서로에게 오히려 도움이 아닌 독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더 우울해지는 것 같고, 나도 우울해졌다. 그날 대화는 했지만 서로 마음이 풀리진 않았다. 서로의 입장만 내세웠다. 그렇게 우린 전쟁 후유증을 겪으며 며칠을 보냈고 며칠 후 엄마에게 남편이 있는 지방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집을 떠났다.
첫째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주말부부였던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가출로 인해 결혼 4년 만에 매일 같이 살게 되었다. 2번의 연이은 유산으로 난임휴직을 받아 1년의 시간이 주어진 것도 한몫했다. 지친 몸과 공허한 마음을 이끌었다. 해결되지 않은 마음과 살림 반은 그대로 남겨 둔 채, 몸만 나온 어설프고 씁쓸한 독립이었다.
그림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