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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니피캇 Mar 15. 2024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고전, 소설)


 우리는 타인의 부러움 어린 시선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지고 만족감을 얻는 경험을 한다. 흔히 돈, 권력, 명예를 얻기 위해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남에게 뒤처지지 않거나 남보다 뛰어남을 인정 받기 위한 본능이다. 돈, 권력, 명예가 없는 것이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기준으로 남과 비교하는 순간부터 우쭐함과 불행감은 반드시 생겨난다. 그러므로 인정욕구라는 본능은 타자의 평가에 의존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평가하면서 바라보고 또 나를 바라보며 평가하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힌다. 

 나 스스로의 삶을 바라보는 자아의 시선이 있는데, 이 시선은 한결같이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시선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바라본다. 문득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었음에도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다.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독립하여 자기 인생을 바라봄으로써 행복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될 기회가 온 것이다. 일찍부터 타인의 시선에 내 행복을 맡기지 않고 자기 삶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 어떤 기준도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돈, 권력, 명예를 얻고서도 행복하지 않을 때 더 큰 돈, 더 큰 권력, 더 큰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삶은 내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내 삶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과,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나의 추측과 상상이 뒤엉켜 일어난다. 이 셋은 모두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만 잘못된 방향도 어쨌든 동력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적 관계에서 우리는 언제나 가치관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가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사는 길이 달라진다. 충분히 숙고한 삶의 의미에 따라 입장을 선택한 사람들은 누가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한결같다. 자기가 원하는 행복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좋은 가치관이냐 나쁜 가치관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놈은 한결같이 좋은 놈이고 나쁜 놈은 한결같이 나쁜 놈일 수 있다. 그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러나 충분히 스스로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내가 원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 어느 날 문득 길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에 행복이 있는지 찾아 헤매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판사로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고 넓은 인간관계를 만들었으나 그에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는 없었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길이 그토록 외롭고서야 자기가 선택했던 가치가 타자를 다스리고 지배하려는 속물적 가면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제야 사랑을 갈구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랑임을 깨닫는다. 아마도 자신이 쓰고 살았던 속물적 가면들도 세상과 타인의 사랑을 받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힘 있고 고급스러운 삶을 살 때에 사람들이 자기 곁에 늘 있는 것처럼 보여서 좋았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여 우쭐했다. 그러나 그런 관심은 진실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면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사회적 힘을 보여줄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반일리치의 사회적 능력에 관심이 있었을 뿐 진심으로 이반 일리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반 일리치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거짓, 주변사람들과 그 자신의 거짓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날들을 해치는 무서운 독이었다.


 삶을 존중하는 태도는 나를 평가하지도 않고 타인을 평가하지도 않는다. 평가란 거짓된 관계의 기초다. 진실된 관계는 조건이 없다. 즉, 조건이 없다는 말은 평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저러해서 당신을 사랑한다.', '이러저러한 조건이 내 이상형이다.' 라는 관계는 거짓이고 독이다. 이런 방식의 인간관계를 지속하면 중독된 것처럼 삶이 망가진다. 타자의 평가 기준에 충족하는 삶을 좋게 여기고 그런 평가기준으로 타자를 평가하게 된다. 서로 평가하는 관계에서는 결코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유일하고 고귀한 인간 존재를 바라보지 못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이러저러한 조건이 충족되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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