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 부조화

by 마니피캇

인지 부조화


인지 부조화(認知 不調和, Cognitive dissonance) : [심리]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와 행동 따위가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 Cognitive - 인지적 dissonance - 불협화음, 불화, 충돌


인지 부조화를 처음 이론으로 정립한 사람은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다. 페스팅거는 사이비 종말론에 빠진 사람들이 종말이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주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다. 1957년 12월 21일, 약속된 종말이 오지 않자 일부는 망연자실했고 일부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그때 사이비 교주가 비행접시를 타고 자신들을 구하러 오기로 했던 외계의 신이 신도들의 믿음에 감동하여 세상을 구원하기로 마음을 바꿨다는 새로운 신탁을 선언했다. 그러자 종말론 신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지구의 종말을 막았다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신도들은 계속해서 사이비 교주를 믿었다.


이 경험을 계기로 페스팅거는 실험을 하나 하게 된다. 실험 참가자들을 무작위로 A, B 그룹으로 나누고 모든 사람들에게 고깃덩어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의미 없는 일을 반복시켰다. 그러다가 다음 실험 참가자들을 투입한다고 거짓말을 한 후 기존 참가자들에게 반드시 실험이 가치 있고 재미있었다는 거짓 후기를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A 집단에게는 참여의 대가로 1달러를 지불하고, B 집단에게는 20달러를 지불했다. 그 후 1달러를 받은 A 집단의 사람들은 겨우 1달러를 받고 그런 쓸모없는 일을 했다는 자괴감을 숨기기 위해 그 실험이 정말로 재미있는 경험이었다며 스스로의 기억을 왜곡하였다. 나중에 페스팅거가 정말로 아무 의미 없는 작업이었다고 솔직하게 말을 해 주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스워 보이겠지만 웃을 일이 아니다! 인지 부조화 상황을 맞았을 때 누구나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인지 부조화 현상의 이야기는 이솝 우화의 여우와 포도 이야기이다. 여우는 나무에 달린 포도를 따려고 애를 썼으나 닿지 않았다. 결국 지친 여우는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어서 신 포도일 거야.'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떠난다. 포도를 얻을 수 없는 이유는 여우 자신의 문제였지만 필요 없어서 스스로 버린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 곁에 흔한 인지 부조화


요컨대 인지 부조화란 자신의 원초적인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이다.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의지가 선택을 이끌지 못하고 선택에 종속된다. 즉, 그 선택을 하는 과정이 논리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논리를 끼워 맞추고 내 의지와 주도적인 판단이었던 것처럼 꾸민다. 그러나 그것이 인지부조화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미국 언론인 에즈라 클라인은 문제의 "정확한 정답을 찾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지력을 쓰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면 된다고 하였다.(Ezra Klein. "How politics makes us stupid", 2016) 예를 들어, 인지 부조화에 빠진 사람은 열정적으로 투신했던 어떤 일이 어떤 계기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는 외적, 내적 자극을 받게 되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 방어기제를 펼친다. 정말로 그 일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 지를 검증하기보다 없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내고' '믿는데' 힘을 기울인다. 가치 없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자각은 자신의 본질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기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인지 부조화 상황을 맞이하면 반사적으로 자기 생각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상황이나 세상을 자기 생각에 맞추려고 한다.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싱크 어게인(2021)'에서 보통 사람들은 세상과 의견이 충돌할 때 자기 의견이나 행위의 가치에 대해 전도사가 되어 설교하고, 검사가 되어 반박하며, 정치인이 되어 공작하고 방어하려 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추구한 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 보다 남의 평가에 따라 움직인다.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는 쪽으로 선택하고는 마치 자기도 원래 남들과 같은 생각이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 자존감에 상처가 만들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행동이 틀렸거나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인정하면 자기 자신 전체가 의미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고통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듯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지키려고 하는 것은 인정 욕구다. 인정 욕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존재감이다. 무시당하기 싫어하고 소속 집단의 주류가 되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적인 욕구다. 실제로 뇌가 보호하려고 하는 자기란 시상하부의 본능적인 욕구를 관장하는 신경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과학적 사실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몸과 정신을 가꾸기 위해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가치를 높이는 계획을 세운다.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가꾸기보다 폭력이나 분노, 슬픔 등의 감정으로 타인의 관심과 반응을 바라는 행위를 한다. 그것도 안되면 세상과 단절하여 상처 받는 루트를 차단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인정 욕구는 삶의 방향을 흔들 만큼 중요한 요소이다.


이쯤 되면 누구나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경험도 있을 것이다. 작은 인지 부조화는 일상에서 자주 일어난다. 내 주변인에게, 그리고 사실 나 자신에게도 그러하다. 나는 30대에 4년 정도 귀농을 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왜 갑자기 귀농을 했는지 궁금해했다. 실제 이유는 경제적 생존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에 상처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농부라는 직업을 가진 시인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농부 시인 또는 시인 농부라고 하면 품위가 높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시를 쓸 능력은 터무니없이 졸렬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나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라도 된 양 나도 자연을 사랑하고 물욕 없는 고결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의식이 점점 강해졌다. 심지어 시도 썼다! (오해가 될 수도 있는데 농부라는 직업을 낮추어 본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농사를 지으러 갔던 이유가 고급스럽지 못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였다.)


삶의 목표는 행복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신념을 형성한다. 가치관이라고 해도 좋고 누군가는 개똥철학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데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자문에 대한 자답이 바로 신념이다. 성장하면서 인생에 대한 자문자답이 차곡차곡 개념으로 쌓이면 뇌는 튼튼한 구조로 신념의 집을 만들어 자기가 생각하는 행복의 개념을 보호한다. 뇌가 그것을 '행복의 개념'이라고 규정하면 할수록 신념의 집은 튼튼해진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행복이라고 여기는 삶의 목적은 다르며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얻거나 이루기 위한 삶의 방향이나 방식을 신념 또는 가치관으로 가진다. 현대 아들러 심리학은 사람의 신념이 10세를 전후하여 형성된다고 한다. 신념은 성장하면서 점점 공고해지기 때문에 고집이 생기고 변화가 어렵기도 하다. 이때 자기 가치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도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세계평화를 행복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닐 수도


사람마다 다양한 관점과 가치관이 생기는 것에 대해 작가 라이언 홀리데이는 우리의 '인식'이 사실을 해석한 주관적 정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관찰의 눈'과 '인식의 눈'을 가지고 있다. 관찰의 눈은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고, 인식의 눈은 현상 이상의 무엇을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눈이다. 주관이 개입하는 인식은 응용과 창의를 위한 고급 능력이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인식의 주관적인 기제가 개입하여 나를 "이기적이고" "아둔한" 상태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라이언 홀리데이는 우리의 인식능력을 두고 "우리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제공한다."라고 하였다.(라이언 홀리데이, 돌파력, 2017) 인식이 만들어낸 주관적 평가가 선입견이 되어 현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과도한 두려움을 가지거나 반대로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카이스트 뇌 과학자 김대수 교수가 뇌의 정보 저장 방식을 객관적인 오브젝트 군과 주관적인 오브젝트로 나눈 것도 비슷하다. 김대수 교수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뇌에 기록된 정보이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 뇌는 어떤 정보를 저장할 때 객관적 정보와 주관적이고 해석된 정보를 저절로 카테고리화 한다. 그러나 타고난 우리의 의식은 그 범주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평소에 독서와 생각하는 훈련이 되지 않으면 내가 아는 정보들이 객관적인 내용인지 주관적인 평가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아무튼, 김대수 교수는 실제 대상과 뇌에 기록되는 정보를 구분하기 위해 뇌에 기록되는 정보를 오브젝트라고 부른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실제 대상이 아니고 정보화된 오브젝트이고, 오브젝트에는 무조건 주관적 평가가 추가되기 때문에 안다고 하기보다는 '안다는 느낌'이라고 하자고 제안하였다. 김대수 교수가 표현한 바 대로 '안다는 느낌'에 불과한 우리의 인식이 객관적 사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뇌는 내가 인식한 주관적인 판단과 평가를 객관적 사실이라고 규정하는 실수를 쉽게 범한다.(김대수, 뇌 과학이 인생에 필요한 순간, 2021)


뇌는 혼란을 용납하지 않는다


뇌의 실수에 대해 신경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살펴보자. 인지 부조화란 인지한 다양한 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과 신념, 현재의 감정,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 등이 머릿속에서 어색하고 모순된 상태다. 모순은 앞뒤가 맞지 않는 혼란이다. 그런데 뇌는 이런 모순된 상태와 혼란을 너무 싫어한다. 아니, 아예 용납하지 않는다.


예일대 신경의학자 엘리에저 스턴버그는 뇌는 어떻게든 모순되지 않은 상태를 만들려고 애쓴다고 설명한다. 실명하였으나 자신이 실명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톤 증후군(Anton's syndrome)이라는 희귀 질환이 있다. 그들은 보지 못하지만 잘 보인다고 주장한다. 안톤 증후군 환자들은 실명으로 인해 실수를 하게 되면 주변이 어두워서 그렇다거나 안경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그렇다는 등의 이유를 댄다. 이들이 실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각을 받아들이는 뒤통수엽의 시각피질과 그것을 종합하여 영상화하는 왼쪽 마루엽(두정엽) 사이의 상호작용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각정보를 받지 못한 마루엽이 아무런 영상을 만들어 내지 못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톤증후군 환자들은 명백히 자신들이 '보고 있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안톤증후군 환자들은 후천적인 시력의 상실이기 때문에 본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고 학자들도 그들이 실제로 이미지화한다고 인정한다. 안톤증후군 환자들은 뇌가 상상해 낸 영상을 실제로 자신들이 보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들의 뇌는 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일까. 이것은 혼란을 평정하는 뇌의 무의식적인 절대 왕권이다. 안톤증후군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도 뇌의 이러한 작용을 자주 경험한다. 꿈에서 우리는 모순 투성이의 상황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 수면 상태에서 뇌 활동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영상과 음향이 꿈속에서 우리에게만 보이고 들린다. 상상으로 듣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의 전개가 나타나면 뇌는 평소처럼 이상하다고 판단하지 않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논리라고 인식하도록 강제한다.(엘리에저 스턴버그,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2019) 즉, '늘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인지 부조화에 빠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뇌라는 것이다.


틀린다고 당신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인지 부조화로 인해 모순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이 사실인지를 조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상황을 외면하거나 자신의 오류나 어리석음을 감추려는 노력을 한다. 설령 그것이 거짓말일지라도 자신이 어리석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다면 그 거짓 내용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사실(fact)은 거부할 수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원래 자신의 신념이 밝혀진 사실에 부합했던 것처럼 태세를 전환하기도 한다.(비슷하게 또 어떤 경우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신념을 억지로 맞춰 끼우기도 한다. 주로 '철새' 정치인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때 인지 부조화인 사람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원래부터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고 끼워 맞추고 변명이나 거짓말을 만든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적 대응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정신 이상이나 지능의 부족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자신이 인지 부조화에 빠져 있으면서도 남의 인지 부조화는 또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기 때문이다. 인지 부조화 상태인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인지가 아니라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 또는 훌륭하다는 것을 주장할 근거다.


신념이나 가치관이라는 것은 자아에 입혀진 갑옷일 수는 있어도 자아에서 분리될 수 없는 본질은 아니다.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자아 그 자체인 줄 착각한다. 그래서 신념이 상처 입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지 부조화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념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 또는 뇌가 인식하는 자아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자아와 신념을 의식적으로 구별하지 않으면 착각한다. 내가 살아온 흔적이 모여서 신념을 이루었기 때문에, 어쩌면 신념이 부정되는 것을 살아온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해결책은 별로 어렵지 않다. 신념이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해결된다.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가도 '뭐야, 내가 속았네.'라고 판단하기만 하면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쪽팔린다는 감정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내 착각이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지 부조화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어딜 가나 폭탄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진상이 되기도 한다.

실수해도 괜찮다. 틀려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니까.


"누구에게도 뭔가 증명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해요."
(프레드릭 배크만, 불안한 사람들, 2021)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능력


사람들은 자신의 틀렸음을 인정하면 지조 없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폄훼당할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틀리는 어리석음과 자신이 무엇을 틀렸는지를 깨달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남의 말에 잘 휘둘리고 그저 도청도설(道聽塗說)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틀리는 것과 답을 찾아가는 스스로의 과정을 점검하고 나의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들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은 틀림의 레벨이 다르다. 틀렸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사실 후천적으로 성취하는 하나의 능력이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성취다. '내가 옳을까?' 라며 자문하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진지하게 곱씹고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찾기 위해 항상 마음을 열어둔다. 예를 들어, 애덤 그랜트 교수가 노벨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을 만났던 일화는 인상 깊다. 그랜트는 카너먼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강연을 하였다. 그 후 카너먼은 그랜트가 맞고 자신이 틀렸다면서 그것을 발견해 준 그랜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했다. 카너먼은 틀렸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 문제에 틀리지 않을 수 있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애덤 그랜트, 싱크 어게인, 2021) 자기 영역에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에게 그 영역에서 틀린 점을 지적한 애덤 그랜트도 대단하지만 새카만 후배의 지적을 듣고 자기 이론을 다시 검토하는 카너먼의 틀림 레벨은 더 대단하다. 내가 그런대로 잘한다고 생각하는 영역에서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는다면 나는 아마 발끈하여 반박할 방법부터 찾았을 것이다. 이 위대한 노학자에게 틀림이라는 것은 한걸음 더 나아감이지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스스로 틀렸다는 의심이 들 때 잠시 멈추어 상황을 곰곰이 돌아볼 수 있다면 그는 능력자다.


김대수 교수는 '뇌 과학이 인생에 필요한 순간(2021)' 에서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의 입장에서 군주의 개념은 성을 지키고 있는 최상위의 존재였으므로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선조의 모습은 적군에게 인지부조화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하였다. 자기네 나라에서는 성이 점령당하면 군주가 자결하여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조선과의 전쟁에서는 궁을 점령하여 이겼는데도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갔다. 그들의 눈에 달아난 선조는 더 이상 왕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전쟁은 자신들의 승리로 끝났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은 달랐다. 왕이 곧 국가의 핵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왕이 굴복하지 않는 한 아직 진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신념에서 '국가=성'이었지만 조선의 신념에서는 '국가=왕'이었고 왕이 여전히 항쟁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개념 영역의 차이가 전쟁을 계속하게 만들었고 조선이 일본을 퇴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대수 교수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또 다른 인지 부조화가 생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선조는 피난한 사건으로 무능하고 비겁한 왕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김대수 교수는 선조 스스로가 조선의 왕으로서의 개념을 확장하는 뇌 기능적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상대의 인지 부조화를 이용하여 종국의 승리를 얻었다고 한다. 선조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선조를 무능한 왕이라고 생각했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짐을 느낀다. 여기서 김대수 교수의 주장과 근거를 곱씹으며 타당한 지 따져보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즉, 인지 부조화 상태를 싫어하여 용납하지 않는다. 인지 부조화에 빠지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 인식에 문제가 발견된 상황에서도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보다 나는 옳은데 타인이나 외부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기 쉽다. 뇌의 자기 보호 시스템이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우리는 자주 '정확히 설명은 못하지만 저 사람은 (또는 저 상황은) 이상하다.' 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물론 설명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정말로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은 언제든 수정 명령을 추가로 집어넣을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완성되어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진실을 찾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보고 싶은 답을 이미 정해 놓았는가


인지 부조화는 정신질환이 아니지만 그런 수준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신념과 가치의 토대가 불안한 사람들에게 매사의 어려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본인의 인지부조화 때문에 주변인들이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반면에 적절하게 활용하면 인지 부조화가 고통을 극복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나의 귀농 생활은 인지 부조화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내 가족이 나의 인지 부조화에 동의하지 못했다면 나만 만족스럽고 가족에게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 내 시와 글이 형편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시인 농부가 되겠다는 급조한 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글을 잘 쓰는 줄 착각하고 가족들은 시골생활 그 자체에 고통을 받았다면 갈등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인지부조화 상황에서 나 자신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직시하지 못하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다. 인지 부조화 현상은 저절로 일어나지만 그것을 깨닫는 능력은 후천적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톨스토이의 '고백록'에 톨스토이의 지인이 어떤 계기로 30년 넘게 신앙을 버린 이야기가 나온다. 정교회 신자였던 그 사람은 26 살의 어느 날 형과 함께 사냥을 나갔고 야영을 하게 되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잠들기 전 정성껏 기도를 하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형이 그를 향해 "너는 아직도 그런 짓을 하느냐?"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후 그는 신앙을 버린다. 그가 신앙을 버린 것은 신념이나 결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기도하는 행위와 신앙을 다른 사람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순간 자기가 부정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톨스토이, 고백록, 1879) 그뿐이다. 그는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고 미사에 참여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신앙은 내재화된 동기나 신념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외부 자극에 좌우되는 가벼운 것일 뿐이었다. 형의 빈정거림을 듣고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성찰을 시도하지 않고 '신앙생활은 비웃음의 대상이구나. 내가 비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고백록을 쓸 즈음의 톨스토이가 그 지인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전에도 위대한 지성인이며 작가로 추앙받던 톨스토이의 깊은 신앙심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아, '그래 원래 내가 옳았던 거야' 라면서 늘 훌륭한 신앙인이었던 것처럼 다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를 시작했을까? 아니면 이번에는 충격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화되었을까?


한 걸음 물러나서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자기를 객관화해야 한다.

진실을 찾는 사람과 내가 원하는 답을 찾는 사람은 인지 부조화를 돌파하는 방향과 방법이 다르다. 진짜 진실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답을 이미 정해 놓은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답만이 진실이다. 그는 인지 부조화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면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있는 사람들은 내가 틀려도 흐트러질 이유가 없다.



<참고도서>

뤼트허르 브레흐만, 휴먼카인드

뤼트허르 브레흐만,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애덤 그랜트, 오리지널스

애덤 그랜트, 싱크 어게인, 2021

엘리에저 스턴버그,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2019

톨스토이, 고백록, 1879

라이언 홀리데이, 돌파력, 2017

라이언 홀리데이, 스토아수업, 2021

김대수, 뇌가 인생에 필요한 순간, 2021

프레드릭 배크만, 불안한 사람들, 2021

기시미 이치로,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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