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태주 시인의 책에서 외로움은 무서운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읽었다. 어떤 아이가 혼자 살고 있는 마을 노인에게 저런 큰 집에 혼자 살면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네가 무서운 게 뭔지나 알고 묻는 거냐?"
"친구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 건 무섭다고 하는 게 아니라 외롭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요. 혼자 있으면 무섭잖아요."
외로움이 무서움에 적어도 포함관계라는 사실은 외로움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외로움의 공포는 사람을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만들어서 심각한 애정결핍으로, 심각한 무기력으로, 심각한 공격성으로, 심각한 무심함으로 드러난다.
조OO 어르신은 처음에는 내가 만나야 할 분이 아니었다. 시작하고 몇 주 후에 새로 맡은 집이었다. 어르신은 나를 처음 만난 날부터 40분이나 붙잡아두고 네버엔딩 스토리를 풀어놓았다. 유튜브에 나온 정체불명의 미래학자가 말했다는 세계 멸망 음모론, 병원 의사들이 돈을 더 벌기 위해 치료를 더디게 한다는 음모론, 대한민국에 일본인의 핏줄이 30% 이상이라는 음모론.... 그 와중에 일관된 숫자를 구체적으로 외우고 계셨고(특히 중국과 인도 인구의 최신 통계자료를 꿰고 계심), 나름 논리 정연하기도 했다. 아마도 여유가 된다면 몇 시간도 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듣는 사람의 여유 말이다.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시계를 보기 위해 휴대폰을 열었다. 대화 중 시계를 보는 행위는 '저 바쁩니다.' 라는 의미다. 그랬다. 나는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폰을 보자마자 다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내 휴대폰 첫 화면에는 고(故) 이태석 신부님이 웃고 있다.
몇 시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 주고 싶다."라는 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음에도 점점 더 커지면서 머리에 가득 차는 그 말씀.
함께 있어 주고 싶다.
함께 있어 주고 싶다.
함께 있어 주고 싶다.
내가 하려는 일이 반찬 택배인지 함께 있어 주는 일인지는 그들을 만나는 동안 일어나는 감정들과 나의 사소한 태도에서 결정 난다. 이제 음모론에 맞장구도 치고 기분 좋으시라고 질문도 한다.
헤어지면서 어르신이 말했다. "정말 좋은 사람 같아. 하루 종일 말할 사람이 없는 게 가장 힘든 일이거든. 요즘은 망할 그 바이러스 때문에 어디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잖아."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외로운 분들은 바이러스가 문제가 아니었던 시절에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덟 사람 가운데 가장 연세가 많은 이OO 어르신은 방문할 때마다 조금 긴장된다. 집 안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는데 한참을 받지 않으시면 불안이 조금 더 커진다. 혹시 혼자 계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봐. 어르신은 내가 다녀가고 몇 시간 뒤 꼭 전화를 하신다.
"거~ 뉘쇼?"
"어르신, 오늘 낮에 반찬 배달 갔던 젊은 사람입니다."
"엥? 젊은 사람은 요새 안 오던데? 아~ 그 아저씨!"
"네.. 네..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전화가 와 있길래 누군가 하고 연락을 해봤구마."
어르신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기에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고 계시거나 낯선 전화도 반갑다는 의미가 아닐지... 하고 생각했다.
"네~ 식사는 하셨어요?"
"예. 내가 젊을 때 원양어선 주방장이었거든. 밥은 잘하지."
그리고 어르신은 예고도 없이 전화를 뚝 끊는다.
고독사에 대한 뉴스가 가끔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뉴스를 보았을 때는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그뿐이다.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감정 이입이 그리 길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뇌에는 공감을 담당하는 거울신경이라는 세포가 있다. 거울신경은 타인의 감정을 반영하여 나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거울신경의 존재 때문에 타인의 고통과 즐거움이 나에게도 아픔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울신경의 크기는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다르다고 한다. 그 크기는 곧 공감의 크기이기도 한데 나와의 심리적 거리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카이스트 뇌 과학자 김대수 교수는 그것이 어쩌면 내 자아의 범위라고 했다. 노인들을 방문하면서 이제는 고독사에 대한 뉴스가 새삼 더 애처로운 일로 느껴진다. 아마도 내 존재의 범위는 내가 있는 곳, 내가 가는 곳인가 보다. 어쩌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외롭기 때문에 서로에게 거울 신경을 비추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 거울이 다른 사람들을 담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마음에 있는 거울로 나를 보는 것이다. 그의 마음에 내가 비친다는 것이 바로 나에게 위안이지 싶다. 최소한 내 주변에는 어디에도 혼자 있는 사람이 없도록 당신이 자신의 범위를 더 넓히면 당신의 범위에 닿은 이들이 당신을 비춘다. 그리고 당신의 거울은 그를 비춘다. 그러면 나와, 당신과, 우리의, 외로움의 공포가 사라지리.
림태주 시인의 수필에 등장한 그 노인은 그 아이 덕분에 집의 담장을 허물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아버지와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