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du의 와인 이야기 및 테이스팅 노트
도멘 듀작 (Domaine Dujac). 사진첩을 뒤져보니 2017년 봄에 듀작을 처음, 제대로 만난 거 같다. 하얀 테이블보 위엔 내 입이 닿을 잔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시음할 와인 병도 멀지 않은 곳에 일렬로 대기 중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이유는 테이스팅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술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와인 메이커가 손수 자신의 귀한 자식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도멘의 설립자인 자크 세스 (Jacques Seysses)의 아들 제레미 세스 (Jeremy Seysses)는 와인이 차례대로 와인 잔에 담길 때마다 어떤 와인인지를 설명하고 목구멍을 타고 와인이 내려갈 때마다 어떤지를 물어봤다. 와인에 담긴 역사, 철학, 열정, 떼루아, 포도, 아로마 등에 관한 이야기는 장황하지도 소소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놓칠세라 입은 분주히 와인을 음미하면서도 귀는 쫑긋했고 눈으로는 맛난 와인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했다.
자크 세스의 아버지, 루이 세스 (Louis Seysses)는 비스킷 제조업자였는데 좋은 음식과 와인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뱅커였던 자크 또한 아버지 못지않은 테이스트를 가진 인물이었던지라 와인 메이커의 길을 걷게 되었다. 와인 메이커 중엔 전직을 한 사람들이 꽤 있다. 예술가, 엔지니어, 의사 등 다양한 직종에 있던 사람들이 와인 양조로 성공을 거둔 사례를 보면 놀랍다. 여하튼 은행업에 종사하던 그가 와인 양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을 테지만 도멘에서 수습생으로 일하면서 유명한 와인 메이커들과 만남을 갖게 된다. 그중엔 DRC의 수장인 오베르 드 빌렌 (Aubert de Villaine)도 있었다. 1967년, 그는 Domaine Graillet을 매입해 Domaine Dujac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당시 그는 도전적인 행보를 하였는데 전통적인 와인 양조법에 첨단 양조 시설을 더해 떼루아의 특색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게 말이 쉽지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깐 전통과 현대를 접목해 좋은 거는 다 하겠다는 의미. 머지않아 듀작 레이블 와인은 프랑스 고급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었고 빈야드를 점차 확장하면서 국외로 와인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제르미는 와인 메이킹과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는 셀러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다. 도멘 듀작은 프랑스 부르고뉴의 저명한 와인 메이커 중 하나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멘 듀작하면 모레 생 드니 (Morey-Saint-Denis)와 끌로 드 라 로슈 (Clos de la Roche)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매입한 도멘이 모레 생 드니에 위치하니 그럴 만도 하다. 물론, 샹볼 뮈지니도 있고 퓔리니 몽라셰도 있고 본 마르도 있고... 모레 생 드니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남은 거도 다 듀작 덕분이다. 2001년부터 오가닉 또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따르고 있으며 자크 세스와 달리 제레미는 숙성 시 뉴 오크통 비율을 줄이고 이산화탄소 제거를 위한 래킹(racking)을 실시, 전체 포도송이를 사용하기보다는 줄기를 일부 제거 (destemming)하는 등 구조감과 타닌은 유지하되 아로마는 풍성하게 유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빈야드 관리나 양조법에 대해 알지 못해도 마셔보면 풍성한 아로마와 깊이는 알 수 있다.
내가 모레 생 드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샹볼 뮈지니만큼 하늘하늘하지 않고 지브리 샹베르땡처럼 무겁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자도 빈티지도 천차만별인데 지역을 이렇게 단순하게 분류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는 건 안다. 그럼에도 내가 모레 생 드니를 조금 더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추구하는 것과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무르지도 않고 너무 거세지도 않지만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랄까. 모레 생 드니는 그걸 이미 갖추고 있는 느낌이다. 듀작의 모레 생 드니에서 산뜻한 레드 베리, 쌉싸름한 다크 초콜릿, 허브 등의 아로마가 느껴졌다.
끌로 드 라 로슈 (Clos de la Roche). 누군가는 그랑 크뤼 피노누아면 당연히 맛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맛있는 거에 사람을 홀릴만한 매력이 있어야 진정한 그랑 크뤼 피노누아가 아닐까? 2006 빈티지 끌로 드 라 로슈는 숨겨진 다크한 모습을 엿본 느낌이었다. 동물적이면서도 유혹적인 향이 났다. 머스크(사향)가 지나가면 꽃향이 나고 이것이 지나가면 다시 과실 향이 올라왔다. 풍미도 깊이도 여운도 모두 훌륭했다. 앞서 시음한 듀작의 와인들도 훌륭했지만 끌로 드 라 로슈 앞에서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듀작하니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더 있다. 피노누아뿐 아니라 퀄리티 샤도네이를 만드는 듀작이기에 모레 생 드니 블랑은 내가 좋아하는 화이트 중 하나다. 어느 날 블랑을 오픈하는 걸 지켜보며 한 잔을 받았는데 그날따라 화이트 와인이 거짓말 보태 2배는 맛있었다. 나는 그날의 분위기가 좋아서 내가 살짝 취한 상태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빌라쥬 블랑이 아닌 퓔리니 몽라셰 프리미에 크뤼였던 거다! 퓔리니 몽라셰 프리미에 크뤼가 약 2.5~3배 정도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은 와인이다. (가슴 아픈 일이었겠지만 그분께 아직도 감사드린다.) 산도도 적당하고 복합미가 넘치는 화이트 와인으로 레드 와인과 비교해도 될 만큼 풍성한 아로마를 뽐냈다.
부르고뉴 꼭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