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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te Mar 23. 2022

음악과 권력1

쇼스타코비치 심포니 7번

Ich war wie ein Aussätziger, Keiner besuchte mich, niemand erkannte mich auf der Straße. Alle hatten Angst.
-Dimitri Schostakowitschs-

그날의 저는 사람들에게 나병환자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 누구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고 길거리에서 저를 봐도 아는척 하지 않았어요. 
모두가 제게 아는척 하기를 두려워했었죠.
- 쇼스타코비치-

'Musiker und Mächtige - Veronika Beci, 음악과 권력 - 베로니카베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으로 국제정세가 혼란스러운 지금

우크라이나 점령 계획을 시작으로 러시아 지도부의 소련 사회주의 재건에 대한 야욕이 드러난 지금!

음악 큐레이터 이자 음악사 덕후인 뮤트는 오늘날 러시아 지도부가 (아니 푸틴이) 왜 저런 깽판을 치지 하고 궁금해서 러시아의 역사를 과거를 타고 찾아보다가 과거 러시아가 사회주의 체제였을때 오늘 푸틴과 같은 

독재자가 러시아를 지배하던 시절에 과연 러시아의 음악가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었으며 어떤 음악을 만들었을까 궁금해하며 근현대 러시아의 음악과 작곡가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작곡가 중 차이코프스키 다음으로 유명한 쇼스타코비치 라는 작곡가에 대해 오늘은 '권력과 음악'

이라는 주제로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사후에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이 분분합니다.

독재정권과 불합리한 전쟁에 대해 음악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작곡가,

권력에 빌붙어 불합리한 체제를 선전했던 어용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후대사람들의 엇갈린 평가에도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의 음악이 시대의 굴곡에 의해 

극단적으로 이용당했어도 폭력과 광기의 시대에 예술을 향한 본인의 의지를 굳세게 지키고 자신의 방식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곡가라는 사실은 분명한것 같습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쇼스타코비치



1936년 스탈린이 본격적인 공포정치의 시작을 위해, 본인의 권력의 기틀을 더욱 다지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정치, 문화와 예술, 언론, 등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이 통제와 감시에서 음악계도 비켜갈 수 없었는데 비교적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있었던 스탈린 전 시대부터 작곡활동을 했던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공포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죠.

일명 대숙청 시대라고 해서 당시 소련공산당의 사회주의에 반하는 정치, 경제, 국방, 행정, 사법, 언론, 문화예술, 과학기술, 교육, 농업, 산업 등 전 분야의 사람들이 모조리 숙청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 러시아에서 제법 이름을 알렸던 쇼스타코비치는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유력한 통제대상 중에 하나였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당시 소련에서 제법 유명한 음악가 중 한명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스탈린 체제로 들어가기전까지 neue Musik (신 음악) 작곡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나라 중 하나였는데 알반 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다리우스 미요 등 당시 내로라 하는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음악이 자주 연주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쇼스타코비치는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들과 교류하며 음악커리어를 쌓아 나갔는데 특히 그의 작품 심포니2번은 소련혁명10주년 기념 작곡상을 수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작곡 소재나 기법에 있어서 어느 하나의 음악사조에 머물지 않고 창의적인 작곡활동을 계속했고 오페라, 교향곡 등 작품들을 계속 써내려 나갔습니다.


므첸크스의 맥베스 부인과 프라우다



사건은 그의 오페라 므첸크스의 맥베스 부인 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쇼스타코비치의 두번째 오페라 므첸크스의 맥베스 부인은 그의 많지 않은 오페라 세편중 하나로 당대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중의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한 여인의 일생을 그린 작품인데 러시아의 소설가 니콜라이 레스코프 의 소설을 오페라 작품화 한것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일반대중과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소련 뿐 아니라 유럽 주요 도시에서 공연되고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시 소련 대표 일간지인 '프라우다' 의 논평에서 최악의 혹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프라우다 일간지는 당 기관지로써 스탈린체제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충실히 했던 신문사 였기에 이 기관지에 혹평으로 비판을 받은 쇼스타코비치는 이른바 숙청의 대상으로 생각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프라우다는 오페라 맥베스 부인에 대해 '음악이 아닌 카오스', '곳곳의 의미없는 불협화음은 혼란만을 

야기했다', '지극히 위험한 좌파적인 생각을 갖고있는 음악' 등 혹평을 쏟아냈는데 이것은 곧 예술에 대해 

당에서 직접적인 통제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기사는 곧 스탈린의 생각이었는데 실제로 스탈린이 이 공연을 보고 중간에 자리를 뜬 이후에 발행된 기사라 예술을 통제하려는 스탈린의 의지였음이 확실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스탈린이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맥베스 부인' 을 보고 중간에 나가버린 후 소련의 일간지 '프라우다' 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혹독한 비평을 통해 그를 '민중의 적' 으로 만들어 버리고 난 뒤의 쇼스타코비치의 신변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스탈린 직속 경찰들이 밤마다 그를 불러 심문했었기 때문에 항상 옷을 입고 언제든지 나갈 준비를 하고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던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문을 구했던 지인이자 군인 '미하일 투하쳅스키' 가 독일군의 스파이로 몰려 처형을 당하자 다른 쇼스타코비치의 주변사람들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그를 찾지 않았고 철저히 혼자서 이 고통들을 감내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변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쇼스타코비치를 국가의 체제 선전용 작곡가로 이용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계적인 명성도 있었고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국가 선전으로 이용 가치가 더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죠. 쇼스타코비치는 결국 당국이, 스탈린이 원하는 음악을 새로 선보였고 당국에 입맛에 맞게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들려주자 사회는 그를 다시 인정했고 사회적인 성공을 부여했습니다. 그의 음악을 이데올로기로 삼는 당국의 전체주의 체제에서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예술적 자아를 지키는 방법은 어용작곡가로 사는것, 즉 공적으로는 소련 전체주의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반면, 사적으로는 본인만의 다른 창작활동을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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