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오지랖
인생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인생의 끝에는 '죽음' 이란 커다랗고 무거운 단어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그 끝은 언제 닥칠지 그 누구도 모르며 나 자신도 모르고 부모님도 모르고 친구도 모른다.
오직 '신' 만이 아신다고 하지만 내 생각엔 신도 잘 모르시는 것 같다.
아니면 알면서 알려주시지 않는 것일까?
우리 모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이 끝을 어렴풋이 아는 우리는 저마다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 끝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그 끝에서 뒤를 돌아봤을 때 잘 살았다고 인정하기 위해,
나의 죽음의 가치가 아름다워질 수 있게.
나는 시간의 한정적인 가치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정말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시간을 쏟아도 아깝지 않지만
내키지 않는 것을 할 때만큼 아까운 시간도 없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남들에게는 허튼 시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시간마저 아깝지 않다. 철저히 내 기준이다.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것만큼 아까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남에게 무신경하다고 생각하진 않다.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에 같이 슬퍼한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이야기하거나 자연스럽게 화제가 그 주제로 전환되기 전까지 먼저 물어보지 않는다.
아픔이 있다고 한다면 실제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반드시 상대가 먼저 도움을 요청한다면,
절대 먼저 조언하지 않는다. 조언도 상당히 추상적으로 한다.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내 인생도 벅차다. 사실.
나도 아직 내 죽음 앞에서 뒤를 돌아봤을 때 잘살았다고 만족하지 못할것 같다.
나 조차도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데 감히 남의 인생에 끼어들 시간이 있냐 말이다.
'신' 조차도 내 인생에 참견하지 않으신다.
어떤 인생을 살던 그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의 결과이다.
어릴 적부터 '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교육받았지만 생각보다 내 인생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달은 후 내 인생의 결과는 오롯이 나의 몫이 되어버렸다.
이런 '신' 께서도 내 인생에 감히 참견을 하지 않으시는데
우리 인간이 무슨 자격과 권리로 남의 인생에 참견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의 인생에 많이 참견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그들은 본인 인생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인생에 만족하며 살겠냐마는
대다수의 참견쟁이들의 인생이 만족하며 사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것이 나의 경험 중 하나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보기 싫은 자신을 회피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런 식으로 회피하다 시선을 남에게 두고
자신보다 어리거나 경험이 없는 사람을 두고
본인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몇십 번씩 이야기하고 상대를 가치 절하하는 말을 끝도 없이 쏟아내며
상대를 자기 위로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시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부끄러워 자신 없는 스스로를 오롯이 볼 줄 알아야
그때부터 본인에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참견은 본인이 그만큼 스스로의 삶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아픈 일이다.
아프지만 성장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도 배움에는 끝이 없다.
그런 열린 마음이 죽음을 앞둔 우리에게 삶을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참견하지 말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자.
"잘하고 있어! 늘 응원할게 너의 인생을!"
위로와 격려의 말이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