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에 끝나 버린 나의 소소한 모의
웬일로 엄마가 나 없는 동안 동생 집에 가시겠다고 한다. 2박짜리 여행이지만, 엄마 혼자 집에 계시면 영 편치가 않다. 식사도 그렇지만 혹시라도 집 비밀번호를 잊지는 않을지, 가스불 단속은 잘 할지 등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큰동생네는 언제든 엄마를 모시고 갈 태세가 되어 있다. 솔직히 속마음이야 반갑지 않겠지만, 겉으로는 싫은 내색이 없다. 하긴, 당연하지!! 딸인 내가 안 모시겠다고 하면 큰아들인 지가 어쩔 거야! 동생은 기본적으로 장남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타입이다.
1녀3남의 1녀인 나는 짧은 결혼생활 후 아들을 데리고 엄마와 함께 살아왔다. 그 덕에 빡센 직장생활을 큰 탈 없이 견딜 수 있었으며, 나는 아버지 안 계신 집안의 하프(half) 가장 노릇 정도는 해왔다. 뭐 의도치 않은 나름의 상부상조라 할 수 있겠다. 그 사이 남동생들은 결혼하고 아들도 독립하고 자연스럽게 엄마와 나만 남게 되었다. 내가 엄마랑 사는 게 남동생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우리 엄마가 좀 까칠한 양반인가. 그래서 수시로 “똑바로 해! 안 그러면 엄마 너네 집에 보내버린다”를 동생들에게 단골 협박 멘트로 사용해오고 있다.
엄마랑 같이 사는 건 정말 쉽지 않다. 하소연은 다음 기회에 늘어놓기로 하고…
그러니, 어쩌다 내가 집을 비울 일이 생기면, 동생들이 모시고 가는 게 우리집 국룰이다. 문제는 엄마가 싫어하신다는 거다. “내가 이틀 밤 혼자 못 있을까 봐 그러냐? 어디 가는 거 귀찮다. 거긴 아는 노인도 없고 할 일도 없잖아.”를 주장하시는 것까지는 인정! 하지만 “언제 간다고?” “언제 온다고?”를 정말 백 번쯤 물어보시는데, 내가 “그럼 혼자 계세요” 할 수 있겠느냐고.
그런데 이번에 별 거부없이 동생 집에 가시겠다고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질 수밖에. 전 날 모시러 온 큰 동생 편에 엄마용 간식이며 코스트코 밀키트까지 주섬주섬 챙겨서 들려보냈다. ‘오래오래 계시다 오면 좋겠다’는 말은 속으로 삼키면서. 하늘의 응징인가… 갑자기 일행에게 사정이 생겼다는 연락이 왔고, 결국 여행이 취소되고 만 것이다. 아, 얼마 만의 여행인데, 아쉽고 속상하다,고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깨달음이 밀려왔다. 엄마 안 계신 집에서 혼자라니! 만세!!
일단 넷플릭스와 맥주로 그 밤을 즐겼다. 매일 거실 소파의 오브제처럼 앉아 계시던 엄마가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로 집 밖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날 행복하게 하던지. 다음날 브런치(다른 말로는 아점)를 먹고 혼자 영화를 보려고 현관문을 나섰다. 날씨도 좋구나, 콧노래라도 부를 지경이다. 그런데, 문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에 엄마와 큰 동생이 떠억하니 타고 있는 게 아닌가. 거짓말 같다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행이 미뤄졌어.” 한 마디를 남긴 채 다급히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피했다. 아니, 어제 저녁에 가셨는데, 오늘 오전에 오신다고? 집 비운다고 냉장고도 대충 정리해서 먹을 것도 없는데, 그럼 싸서 보낸 간식이라도 반납하든가…. 혼자서 울그락푸르락.
“엄마가 아침 식사 하고 나서 집에 가겠다고 계속 우기시는 거야. 혼자라도 가겠다고 하시니 어떡해. 일단 모셔드리고 이따 밤에 다시 모시러 오든지 하려고 했어”
“일행한테 사정이 생겨서 여행이 취소됐어. 안 그래도 이야기하려고 했어.”
우리 형제는 서로 무슨 거짓말이라도 한 양 변명을 나눠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최대한 늦게 귀가했다. 왜냐고? 엄마 얼굴 보기 싫어서! 나의 소소한 모의는 그렇게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역시 우리 엄마의 촉은 이길 수가 없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