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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톡 주인장 Sep 17. 2023

엄마의 자유분방 기억력, 나는 왜 울고 싶을까?

장기요양등급 신청 해프닝과 나의 종지만한 인성

지지난 주 장기요양등급 심사를 위해 담당자가 집을 방문했다. 기억력은 점점 나빠지시는데 혼자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는 일상이 걱정스러워 신청서를 접수한 지 며칠이 지난 후 였다. 담당자의 의견이 판정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만큼 나도 살짝 긴장이 되었다. 엄마한테는 나이가 아흔이 되면 보건소에서 건강도 체크하고 필요한 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방문한다고 둘러댔다. 

담당자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엄살을 좀 부려야 등급이 잘 나온다고 들었지만, 우리 엄마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 실제로 신체적으로 큰 불편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잘 해야 5등급 정도를 기대한 상태였다. 주위에서 부모님들이 심사관 앞에서 ‘반짝 기억력 상승의 매직’을 이야기할 때는 긴장해서 기억력이 좋아지나? 무심상하게 여겼었다.


담당자와 마주 앉은 엄마를 주방 식탁에서 지켜보았다. 팔 다리를 들어봐라, 걸어봐라, 앉았다 일어서 봐라 등등이야 평소에도 연세에 비해 훌륭한 과업 수행을 보이는 항목. 굳이 “걷는 건 자신 있지. 내가 몸이 가벼워, 지팡이 필요없어”를 덧붙이신 건 그러려니 했다. 식사는 잘 하시냐는 물음에는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잘 먹고. 반찬 없으면 덜 먹고 다 그런 거 아니냐’고 되물으신다. 낯선 동네 가서 길을 잃으시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는 ‘주위 사람들한테 물어보거나 관공서(파출소나 동사무소가 아니라 딱 이렇게 표현하셨다)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아야지. 근데 나 길 안 잃어버려’로 응대하신다. 


집 주소를 아시냐고 묻자 서울시 마포구 블라블라 동호수까지 정확하게 일사천리로 말씀하신다. 이건 진짜 신기!! 집을 못 찾아오지는 않지만 동 호수를 물으면 제대로 말씀하신 적이 거의 없고, 아주 오래전에 살던 동네와 헷갈려 하는 일도 잦았는데, 어떻게 기억해내신 거지? 물론 쉬운 단어 3개를 들려주고 잠시 후 묻는 항목에는 전혀 기억을 못 하시기도 하셨다. 처음부터 기억하라고 시켰으면 할 수 있는데, 아무 말도 안 해서 내가 기억 못하는 거라고 담당자 나무라기를 잊진 않으셨다. (잠시 후 물어볼 테니 기억하시라고 분명히 고지했음.)


시험에 강한 엄마가 아주 약간(!) 귀엽기도 하고 못 마땅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인지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담당자가 돌아간 후 사무실에 나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너 오늘 뭐 하다가 이렇게 늦게 나가냐?”고 하시는 게 아닌가.깜짝이야. “엄마, 조금 전에 보건소에서 누가 와서 이야기 한참 하셨잖아. 나도 그사람이랑 이야기했고. 기억 안 나?” “……. 네가 그러니까 누가 왔다 간 건 기억나. 근데 왜 왔다고 했지? 와서 무슨 이야기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아, 뭔가 쿵 내려앉는 기분. “다녀오겠습니다”를 등 뒤에 남기고 현관문을 닫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심사가 끝나면 다음 순서는 의사의 소견서 제출이다. 며칠 후 평소 다니는 여의도 성모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예진을 먼저 한다. 검사 선생님의 몇 가지 질문에도 어찌나 대답을 잘 하는지, 늘 헷갈리던 병원 이름도 정확하게 말하시고 지시어도 잘 따라하신다. 에고 모르겠다. 되는대로 해야지 뭐. 하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늘 다녀온 병원이 서울대 병원인가? 아, 청량리 성모병원이지?” 물어보시는데 어리석게도 짜증이 밀려왔다.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건지, 왜 이렇게 기억을 못하는 건지, 왜 꼭 평가가 필요한 순간엔 총명해지는 건지…. 그게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데도, 객관적으로 엄마 연세에 이 정도 컨디션도 감사하다는 걸 인정하는데도, 그냥 신경질이 나서 말을 섞기 싫었다. 


엄마의 치매가 가장 두려운 사람은 바로 나라는 불안함 때문이겠지. 나라의 지원이라도 받고 싶은데 협조가 안 되는 상황 때문이겠지. 다 안다고. 다 알지만,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라고!! 이런 일에 짜증을 내는 내 종지만한 그릇을 확인하는 것도 싫다고!! (앞으로 ‘종지 이 여사’ 명찰이라도 달고 다니고 싶은 심정).

그나저나, 세상의 과학자들아, AI 기술만 자꾸 개발해서 인간계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고 대동단결해서 뇌 연구에 좀 집중하면 안 되겠니? 왜 낯선 사람에게 테스트 당한다고 생각하면 뇌가 순간 활성화되는 건지 알려주면 안 되겠니? 아, Chat GPT한테 물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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