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너무 닮았잖아

그래서 맘에 안 든다고요!

by 외강내유 이모씨

5년 전 엄마가 경도인지장애판정을 받았다. 엄마가 치매 고위험군이라는 사실은 복잡한 심경으로 다가왔다. 사리분별 분명한 독설가 엄마와 치매는 안 어울린다. 하지만 인생사 생각대로 될 리 없지 않은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수밖에. 상태가 나빠질까 걱정되어 유심히 관찰을 시작했다. 거의 평생을 함께 살아왔지만 늘 당연하게 무심하게 대해왔는데, 우리 엄마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나와의 관계를 벗어난, 엄마를 설명할 수 있는 팩트를 들여다봤다. 그 과정에서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걸 발견했다. 음, 맘에 안 든다.


그중 하나가 읽기를 좋아하신다는 거다.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무료한 아침 시간도 보낼 겸 엄마를 위해 신문을 구독했다. 엄마는 눈만 뜨면 현관문 앞에 던져진 신문을 집어 들고 소파에 앉으셨다. (비록 읽은 내용은 기억 못하시만) 주말에도 신문을 찾는 일등 구독자인 엄마를 보면 사무실에서 신문을 펼쳐드는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직장시절 나도 일찍 출근한 조용한 사무실에서 신문 보는 시간을 참 좋아했다. 엄마는 홍삼을 나는 커피를 손에 들었다는 게 차이점이랄까.

엄마는 책이 귀하던 학창시절 눈오는 고개를 넘어 옆동네 친구에게 모윤숙의 <렌의 애가>를 빌리러 다녔다고 한다. 밤에 동네 청년들이 다 모여 마을의 닭이나 참외서리를 할 때도 혼자서 책을 읽었다는, 그래서 재수가 없었다는 게 이모들의 전언이다. 절에 다니실 때는 누구보다 불경을 열심히 읽고 쓰셨다. 평소 구청 소식지도, 아파트 현관 문에 붙어 있는 전단지도 그냥 버리지 않고 꼼꼼히 읽으신다. 그런데, 별다른 재능이 없는 나의 유일한 취미도 그 흔한 독서다. 요즘은 바로 앞 페이지 내용이 기억 안 나기도 하지만, 장르 불문 읽기는 즐거운 일이다.


엄마의 글솜씨가 좋다는 것도 새롭게 발견했다. 엄마에게 일기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노트와 펜을 건넬 때만 해도 기억력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동생 집에 다녀온 게 언제인지, 오늘이 며칠인지, 자꾸 물어보지 말고 노트에 일과를 적어서 다시 보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의외로 흔쾌히 노트를 받아든 엄마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한바닥을 채웠다. 깜짝이야. 속도만큼 내용도 훌륭했다. '내가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겠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소스라친다.' 주된 내용은 이룬 것도 없이 세월만 가고 남은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한탄이었지만, 이런 표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가끔 글 잘 쓴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거였다. 어쩐지, 우수상은 못 받고 장려상 수준이더라니, 엄마가 부족하게 물려준 탓이었나?


경제관념이 부족하고 이재에 밝지 못하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엄마나 나나 경제적으로 별 여유도 없으면서 돈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예금이 만기되었다는 연락이 와도 서둘지 않는다. 당장 돈 쓸 일이 없으면 재예치를 해야 할 텐데, 그까짓 이자 얼마나 된다고 담에 가서 하지 뭐, 이런 식이다. 그러다 깜빡 하고 한두 달 넘기기도 한다. 우리 손에 단돈 만 원이라도 그냥 쥐어주는 사람이 없는데, 이건 무슨 태도인지... 빚을 무서워해서 엄마나 나나 평생 은행 대출을 모르고 살아왔다.


엄마한테 무덤덤한 나의 기질도 알고 보니 집안 내력이다. 평소 엄마가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오히려 팩트 공격을 주로 하신다. "맨날 아파서 누워 있으니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인물도 별로라 키 크고 훤칠한 외할아버지랑 안 어울렸다니까." 새댁 시절엔 친정엄마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는 이웃 동무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친정에서 오라고 할까 봐 겁나더라.” 늦게 결혼을 했는데, 넷째 며느리라 층층시하 대가족 시집살이가 오히려 편했다고 한다. 이러니 내가 엄마를 디스하는 것도 전통 계승인 셈인가?


남한테 지기 싫어 가끔은 천연덕스런 거짓말도 하는 대범함, 목표를 세우면 좌고우면하지 않는 끈기,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자존심과 고집, 남이 뭐라든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만다는 소신, 사회 유명인사는 무조건 인정하고 부러워하는 명예욕 등등 정작 엄마의 이런 경쟁력은 다 어디로 가고 내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아쉽다. 우리 4남매는 물론 그 아래 세대도 누구 하나 닮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신기하다. 맺고 끊는 거 부족해 우유부단해 보였던 아버지의 유전자도 은근히 강력했나 보다.


그나저나 우리 엄마가 제대로 공부를 하셨다면 분명 뭔가 이루셨을 텐데... 외할버지, 외삼촌이 아니라 우리 엄마를 밀어주셨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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