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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톡 주인장 Sep 11. 2023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

알고 보니, 닮았잖아!

3년 전 엄마가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았다. 향후 치매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김장 전날 씻어 놓은 갓을 다시 물에 담그는 행동을 연이어 반복하는 걸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 왜 그래?”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리 분별 분명한 독설가 엄마와 치매는 안 어울린다. 구청의 치매 검진센터를 거쳐 연계된 병원에서 뇌 MRI를 찍었더니 기억력을 담당하는 해마의 가장자리가 까맣다. 처방을 통해 속도를 늦춘다는 약을 받아왔다. 


엄마는 유난히 병원과 약을 싫어했다. 다행히 만성질환이 없어서 멀리하고 살아왔는데 처음으로 매일 먹어야 할 약이 생긴 것이다. “치매는 아니고, 그냥 두면 치매가 될 가능성이 크대. 이건 치매 걸리지 말라고 먹는 뇌 영양제 같은 거야.” 혹시 본인이 치매라고 생각하고 의기소침해질까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부처님 믿는 사람은 치매 안 걸린다. 내 나이에 이 정도 기억 나쁜 거야 다반사지. 더 나빠지면 그때 먹을란다.” 약 복용 시점은 본인이 알아서 정하겠다는 자기 주도성. “아, 뭐라는 거야. 의사가 먹으라고 하는데. 안 먹으면 치매 걸린다고!!”


엄마가 치매 고위험군이라는 사실은 복잡한 심경으로 다가왔다. 상태가 나빠질까 걱정도 되고 관찰도 필요해 엄마를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 나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엄마를 설명할 수 있는 팩트가 눈에 보였다. 그 과정에서 내가 엄마를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결국 나는 엄마를 닮았다는 걸 발견했다. 


그중 하나가 글솜씨였다. 엄마에게 일기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노트와 펜을 건넬 때만 해도 기억력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동생 집에 다녀온 게 언제인지, 오늘이 며칠인지, 자꾸 물어보지 말고 노트에 일과를 적어서 다시 보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의외로 흔쾌히 노트를 받아든 엄마는 그 자리에서 휘리릭 한바닥을 채웠다. 깜짝이야. 속도만큼 내용도 훌륭했다. ‘내가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겠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소스라친다. 한평생 이룬 것도 없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도 모르겠다.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수밖에.’ 처음 깨달았다. 내가 어려서부터 나름 글 잘 쓴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거였다. 어쩐지, 우수상은 못 받고 장려상 수준이더라니, 엄마가 부족하게 물려준 탓이었나?


치매 예방에도 좋을 것 같고 무료한 아침 시간도 보낼 겸 엄마를 위해 신문을 구독했다. 경제신문까지 무료로 넣어주는 바람에 매일 아침 두툼한 신문뭉치가 현관 앞에 던져졌다. 엄마는 눈만 뜨면 신문을 집어 드는 일등 구독자다. 아침마다 홍삼 엑기스를 마시며 신문에 열중하는 게 주요한 일상. 그런데, 이런! 조용한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과 함께 신문을 펴드는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직장 시절, 남보다 일찍 출근했던 건 러시아워를 피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그 아침 시간이 좋아서였다. 엄마는 매일 아침, ‘신문값 비싼데 끊어라,’를 고정 레퍼토리로 반복하면서 열심히 보고 계신다.


엄마한테 무덤덤한 나의 기질도 알고 보니 집안 내력이다. 엄마는 그 옛날 새댁 시절, 친정엄마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는 이웃 동무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친정에서 오라고 할까 봐 겁나더라.” 결혼 전 큰이모는 일찍 시집가고 외할머니는 자주 편찮으셔서 집안 살림이 둘째 딸인 엄마 차지였다. 그러다 늦은 결혼을 했는데, 층층시하 대가족 시집살이가 오히려 편했다고 한다. “큰 엄마가 요리도 잘하고 사람도 좋아서 나는 심부름이나 하면 되었거든. 밥도 맛있고, 내가 제일 살 쪘을 때가 그때야.” 


엄마와 닮아서 그런지 반면교사 삼을 교훈도 많다. 나이 들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고집부리지 않기, 하고 싶은 말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기, 가족 간에 자신의 생각을 자꾸 이야기하면 상대방에게는 요구로 들린다는 것 기억하기, 선물은 타박 대신 기쁘게 받기, 약이나 병원은 때맞춰 잘 먹고 다니기 등등. 늘어놓고 나니 한 마디로 나이 들면 자식 말 잘 들으라는 소리다. 내친김에 아들에게 나의 고칠 점을 물어볼까 하다가 거둬들였다. 아직까지는 내가 신세 진 것도 없는데, 내 맘이잖아.


*이 회차는 내가 2021년 펴낸 에세이 <불량한 오십> 중 한 꼭지를 가져왔다. 벌써 만 2년이 지나 엄마의 인지 상태는 더 나빠졌지만, 기본적인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아, 나도 그 사이 더 늙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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