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예쁜 놈 떡 하나 더 준다.

조카의 한 마디가 쏘아올린 작지만 중요한 깨달음


내게 가장 의미 있는 동시에 그만큼 소중한 조카 하성. 선남선녀인 언니와 형부의 좋은 점들만 잔뜩 닮아 눈도, 코도, 입도 그리고 성격마저 귀엽고 예쁜 하성이. 바가지 엎어 놓은 듯 일렬로 맞춰 잘린 앞머리에, 웃을 때면 더 익살맞아지는 두 볼의 인디언 보조개와 언제, 어디서든 흥에 겨워 한 춤출 수 있는 아이. 가끔 인생 2회차가 아닌가 싶은 말과 행동을 해서 사람을 웃게 만드는 아이. 17년도, 내가 24살이었던 해 6월에 태어난 하성이는 내가 25살이 되던 18년도에 첫돌을 맞이했고, 며칠 지나면 올해로 딱 5살을 맞이한다.


좋으면 좋은 대로 왕창 표현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모인 탓에 나는 하성이를 볼 때마다 온갖 부산스러움은 다 가져다가 내 마음을 표현해 왔다. 물론 그럴 때마다 '아 이러다 더 멀어지는 거 아닐까?' 싶은 걱정도 스멀스멀 함께 올라왔지만, 너~무 귀엽고 예쁜 걸 어떡하냔 말이다. 하성이는 그런 이모가 감당이 잘 되질 않는지 내가 주접과 오버를 떨 때마다 더 격렬하게 나와 거리두기를 실천한다. (그렇지만 온전히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언젠가 저녁에 엄마가 하성이를 볼 일이 있었다. 하성이를 보러 가는 엄마와 함께 하성이가 먹을 만 한 게 없나 하고, 집에서 찾던 와중에 마이구미랑 맛밤을 하나 발견하곤 가져가라고 챙겨 넣었다. 저녁을 먹고 온 엄마는, 내가 준 간식을 두고 하성이가 했던 얘기를 전했다.


마이구미와 맛밤을 하성이에게 주면서 "이모가 하성이 먹으라고 줬어~"라고 했는데, 그 말에 하성이가 "이모는 왜 매일 나한테 이렇게 맛있는 걸 많이 줘?"라고 했단다. 그 말은, 평소에도 내가 자기에게 맛있는 걸 많이 준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데 생각해 보면 정확히 '맛있는 거', 그러니까 먹는 것을 많이 주지는 않았다. 다만 '이모의 마음'이라는 명목하에 이것저것 될 수 있는 대로 선물을 주곤 했다. 한 번은 하성이가 4번째 생일을 맞이했던 때는 지난 4년 동안 하성이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꾸며 포토북을 주었고, 한 번은 알바비로 받은 돈으로 옷 한 벌을 사주기도 했으며 또 최근에는 예쁜 양말을 팔던 한 악세사리 샵에서 발견한 포켓몬 어린이용 양말 세 개를 엄마를 통해 전달했다.


사실 하성이의 말을 전해 들은 순간 조금 벙쪘다. 두 가지의 이유에서였는데 첫 번째는 그동안 내 마음이라고 이것저것 해왔던 노력들을, 그가 "이모가 주는 맛있는 것들"로 대표하여 하나하나 기억을 하기는 했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하루아침에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 무언가 내 이름이 나온 것들을 받았을 때마다 차곡차곡 기억해왔던 것이 아닐까 싶은 합리적인 의심. 두 번째는 사실 나에게 위와 같은 질문은 한 번도 '왜?'라는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좋아하니까 뭐든 해주고 싶은'으로 연결되는 당연한 맥락이었고 이 연결고리를 하성이 또한 당연히 알겠지 싶은, 아니 사실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 했을 만큼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고, 그와 친해지고 싶을 때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 그러니까 비물질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되는 대로 아낌없이 주고자 하는 것은 모든 종의 가장 본능적인 지점에서 발현되는 행위다. 어떠한 이익이나 계산과 무관하게 마음의 '순수성'에서 비롯되는. (물론 세상은 넓고 그만큼 다양한 인간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을 매번 철저한 계산에 의해 살아가는 인물들의 케이스는 배제한다)


이 말인즉슨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대방에게서 맹목적으로 받는 것들을 통해 우리는 '널 생각한다' '널 아낀다' '널 좋아한다' 등의 직접적인 말이 없어도 그의 마음과 의도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인데 이와 같은 상호작용이 매끄럽게 이뤄지기 위해서 중요한 게 하나 있다. 많이 주고받고, 확인하는 등의 경험이 반복적으로 축적되어야만 한다는 거다.


하성이를 두고 간과했던 점이 바로 이거다. 내가 하성이를 예뻐해 매번 안달이 나는 이모라는 사실과 매번 그에게 '맛있는 ' 대표되는 것들을 많이 주는 이모라는 사실 사이를 잇는 경험적인 연결고리가 아직은 그에게 없다는 . 여기에 따르자면, 아마도 하성이는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이모는  매일 나한테 이렇게 맛있는  많이 ?"라는 질문을 했던  틀림없다.


사회 경험이라고 해봤자 여전히 한자리 햇수에 머무는 생을 살고 있는 그로써 정말 궁금한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단 1의 악의 없이 순수한 그 질문을 곱씹을수록 웃음도 나고, 한편으로는 하성이가 얼른 더 자라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순간-정확히 말하자면 찾아낸다기보다 체감할 수 있는-이 조금 더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쯤이면 이모가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을 줬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하성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갈지 사뭇 궁금하다. 오래오래 밝고, 건강한 아이였으면 좋겠다.



**

이로써 하성이의 한 마디가 나에게 많은 시사점(?)을 가지고 왔다. 평소에 당연한 것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나, 또 한 번 세상에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설명되지 않으면 때가 될 때까지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음을 깨달았다. 예컨대 나는 A라는 마음에 기초하여 상대방에게 한 행동에 당연히 A-1이라는 결과를 생각했더라도, 그리고 그게 통용되는 사회적 태도라고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 행동의 해석을 위한 연결고리가 충분치 않은 탓에 얼마든 엇갈릴 수도 있겠다는 결론.

매거진의 이전글 찐한국인인 내가, 미국 부통령 연설을 보고 울컥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