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5 출판 편집자의 퇴사 후 직업 성찰에 대한 기록
지난 4월, 퇴사를 하고 팀장님과 약속했던 저녁을 먹기 위해 약 2주 만에 다시 성수동을 찾았다. 퇴근길 무렵 직장인이 아닌 퇴사자의 신분으로 사무실 근처를 배회하다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성수동으로 이전을 하고서 딱 1년 동안 너무 당연하게 또 지겹게 봐오던 그 거리가, 얼마 됐다고 벌써 낯설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자동차 공장이 즐비해 있던 곳이라 거짓말 조금 보태 사람보다, 식당보다 차가 더 많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딘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 차, 커다란 화물차, 고급 외제 차 등, 매번 달갑지 않은 출근길과 진이 다 빠진 퇴근길에 매번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질려갔다는 말이 딱 맞을 거다. 그러나 초보 편집자로서 나의 본격적인 성장을 함께한 곳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한편으로는 마냥 뒤로하고 싶은 곳은 아니다. 싫은 감정도 그에 대한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인 만큼, 뭐든 북적거리고 시끄러웠던 성수동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의 정체성을 조금 더 분명하게 알게 해준 곳이라 의미가 크다.
될 만한 기획을 위해 이리저리 저자를 찾아 헤매고, 발등에 불 떨어진 기획회의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어떻게든 머리 회전을 잘 시켜 기획안을 써낼 궁리를 하고, 나를 믿고 함께해 준 작가의 책을 어떻게 해야 최선으로 만들 수 있을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제목과 본문의 폰트는 그리고 자간은 어떤 게 잘 어울릴지, 문단은 어디서 나누는 게 좋을지, 콤마를 어느 문장의 뒤에 찍을지, 앞에 찍을지, 또 독자들에게 인상 깊을 수 있는 제목은 무엇인지, 1분 1초 매 순간 담당 편집자로서 나의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었다.
'책임 편집'이라는 타이틀에 붙는 내 이름 앞에서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그 선택과 결정에 최선을 다해야 했고, 그럼에도 매번 완벽할 수만은 없는 결과물 앞에서 역량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문제는 좌절과 고민을 하는 만큼 앞으로 나가야 하는 힘도 있어야 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속에서 발전을 도모해 나가는 게 그렇게나 힘들었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사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나의 부족함과 열등감 등을 원동력 삼아 조금 더 파이팅 넘치게 일을 하는 사람과, 문제 해결을 위해 무언가 실천하기보다 그 화살을 나에게 돌려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며 감정을 다 소비하는 사람. 내가 후자의 사람이었다. 말이 '편집'자이지만 편집자는 편집(교정, 교열)만 보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상 기획은 디폴트 되는 식. 전체적인 책의 콘셉트와 진행 방향 등을 결정해야 하는 탓에 디자이너가 따로 있음에도, 디자인에 대한 감각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1교, 2교, 3교 그리고 최종교까지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손볼 수 있는 곳은 다 손보았다고 생각했는데도 돌아서면 보이는 오탈자에, 본문 및 표지 시안에 대한 부정적인 컨펌이 있는 날이면 편집자로서 나의 역량을 의심하고, 자책하기 바빴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일이 내게 잘 맞는다고 생각한 나의 판단이 자만이었나, 싶은 회의감의 연속이었다.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팀장님은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냐고, 할 것이냐고 내게 물어보셨다. 그때 나는 "그렇다"라고 말했고 그 대답은 퇴사한 지 한달이 되어가는 지금 여전히 유효하다.
"마감을 하고도 보도자료를 다 마쳐서 넘길 때까지는 여전히 계속 힘든 것 같아요. 그런데 보도자료 최종 컨펌까지 나고, 모든 손을 떼서 한숨 돌릴 때쯤 책이 온라인 서점에 걸리고, 제가 쓴 보도자료랑 상세 이미지가 동시에 업로드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설레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책이 세상에 나온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몇 달 동안 힘들었던 게 상쇄 가능해지는 느낌이라서 그 기대 하나로 어느 순간 다음 책을 또 만지고,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냥 일종의 중독처럼."
당시 대답 전부가 완전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매번 출간이 있기 직전과 직후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정확했다. 그런 내 말에 팀장님 본인은 편집자 생활 3개월 만에 그런 로망은 다 없어졌다며, 시간이 지나면 이런 로망은 점점 무뎌질 것이라 말씀하셨다.
책 만드는 일은 말 그대로 중독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을 안 거친 게 없는 모든 페이지들이 하나의 물성을 갖고 눈에 보이게 되는 그 지점, 어떤 방식으로든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그 지점이, 대다수의 편집자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로도 많이 좌절하고 깨지고 자책하면서도 내가 결국에 또 이 일을 하게 만들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적, 불안했던 적은 있지만 재미가 없어 억지로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최근에 개인적인 악재가 여럿 겹쳤던 탓에 삶 자체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과 별개로, 장기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과 누군가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어야 하는 일들보다는 다양한 프로세스 속에서, 내가 할 일을 내가 찾고 그러면서 단기적으로 짧고 굵게 끝낼 수 있는 이 일이 내 성격에도 잘 맞는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여느 일이 다 그렇듯, 편집자 또한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직업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의 슬픔보다는 기쁨이 더 크다. 작가에 따라서, 책의 콘셉트와 주제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정, 교열을 볼 때면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 보내기는 하지만 그 외에 내가 말하고,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곧 이 일의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그렇다. 내가 만든 책들이 하나, 하나 책꽂이에 늘어가는 걸 볼 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이다.
언젠가 나도 팀장님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맞는 경력을 쌓아갈 때쯤 과거에는 설레던 일들이 더 이상 설레지 않게 느껴질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흘러가는 시간은 힘이 없고, 관성은 대개 익숙함과 지루함을 동반하니까. 그럼에도 이 일을 하면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단 한번이라도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책 그 자체이든, 보도자료든,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든 지금처럼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드는 의미를 잊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야 나에게, 내가 만든 책이 기여할 수 있는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런 김에 올려보는 나의 발자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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