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는 당연해지는 게 무섭다.

중앙일보, 오피니언, 문태준 시인, '고맙거나 미안하거나'를 읽고


얼마 전 한 시인을 만났더니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은 고맙거나 미안한 일 생각이 더러 나요.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마음은 그리운 것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리운 것이 있는 사람은 마음을 모질게 쓰지 않아요.” 그 얘기를 듣고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고 사흘을 보내면서 내게 고마운 일은 무엇이었고, 또 미안한 일은 무엇이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밥을 먹다 식구들에게 이 두 가지의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내는 미안한 일에 대해 먼저 말을 했다. “이사 와서 저 동백나무를 두 번 옮겨 심었잖아요. 한 번 옮겨 심고 그냥 둘 걸 그랬어요. 우리가 볼 풍경을 위해 한 번 더 옮겨 심은 일이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 마당 구석에서 자라던 동백나무를 두 차례나 옮겨 심었다. 동백나무는 몸살을 앓는 것 같았고, 올해는 동백꽃을 볼 수 없었다.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애타게 지켜보고만 있다. 아내는 고마운 일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강아지를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내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주었잖아요. 내게 강아지를 데려와 키울까를 묻는 듯하더니 금방 밭담을 넘어 강아지를 데리고 오는 당신 모습이 보였어요. 굼뜬 사람이 그날만큼은 얼마나 빨랐는지 몰라요.” 거의 돌보지 않아 깡마른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와 키우기로 한 날의 일을 아내는 떠올려 말했다.

중앙일보, 오피니언, 문태준 시인, '고맙거나 미안하거나' 中


매 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일관적으로 하는 다짐이 있다. 뭐든, 당연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내가 어린 나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어엿한 이모라 불릴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 살면서 가장 많이 깨달은 건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신이 아니고서야 인간인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에는 늘 여전히 많은 모순과 부족함 그리고 부당함 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무언가에 대해 ‘당연하다’라고 말하는 건 대상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는, 오로지 나의 시선과 사고에 의한 오만일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며 이를 경계하려 노력한다.

나는 올해로 9년이 된 우리 집 개가 당연해지는 게 싫다. 그가 사료를 먹고 내 옆에서 사근대며 자고, 귀찮게 해도 끝까지 참으며 받아주는 그 모습들이 당연해지는 게.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지치고 힘들다는 이유로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고 순하니 뭘 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산책을 건너뛸 수도 있을까 봐, 무섭다.

또 먹고 싶은 걸 말할 때마다 다 해주려는 엄마 아빠의 애정이 당연해지는 게, 힘든 일이 있으면 얼굴에 다 티가 나는  언니를, 누나를 있는 힘껏 위로해 주려는 동생들의 태도가 당연해지는 게 싫다.

     

가족이든 친구든 반려동물이든 상대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그 사람이 내게 준 마음을 더 악착같이 챙기고 들여다보며 이걸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저자의 말마따나 수시로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러한 사실을 저자는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것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아날로그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