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이별하는 일

할머니와의 이별이 'pause'에서 'stop'이 되기까지


내가 8살이 되는 해의 겨울까지 줄곧 함께 사셨던 할머니는 오랫동안 앓으셨던 당뇨로 아파하시다가 이례적으로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에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이 말은 즉슨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이뤄졌던 시간에 나는 외가댁에 맡겨진 채 그저 장례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그렇게 좋으신 분 만은 되지 못했다. 본인의 며느리 되는 우리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한국사회 며느리들에게 여럿 응어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소위 '시집살이'를 우리 엄마는 호되게 겪으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며느리로서 힘들어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 선명하기도 하다. 숙명적으로 이어져 있는 딸과 엄마의 관계성에 따라 나는 종종 그런 할머니가 밉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완전히 미워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 늘 맹목적이셨고 그만큼 헤아릴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사랑을 주셨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첫째로 태어났던 덕이 가장 큰 것이었다. 흔한 한국의 윗세대들이 그러하듯이 할머니도 지독한 남아선호 사상을 지니셨던 분 중 한 명이지만 그녀의 첫 번째 손주이자 동시에 첫째였기 때문에 아무튼 나는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챙김을 받으며 살았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에 하늘이 내려 보내준 한 명의 수호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나 나를 끔찍이 여겼던 할머니와의 마지막을, 어찌 됐건 내 의지와는 별개로 함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좀처럼 견딜 수가 없었다.



보통 재생되던 노래를 완전히 멈추기 위해서는 ‘Stop’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리고 잠깐 멈추기 위해서는 ‘Pause’ 버튼을 눌러야 한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던 나에게 할머니와의 이별은 마치 ‘Pause’ 버튼을 눌러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언제까지나 그 버튼 그대로 남아있을 것만 같은 기분, 막연히 추상적인 이별을 끝내 정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줄곧 들어 나를 찝찝하고 괴롭게했다. 따라서 일종의 마무리되지 못한 기억들의 단편으로만 할머니를 기억해야 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 한 번의 사계절이 바뀌었다. 소중했던 사람이 더 이상 내 곁에 없는데도 세상은 참으로 매정하고 또 매정하리 만큼 잘만 돌아갔다. 당연히 나는 한 살을 더 먹어 9살이 되었고 당시 무슨 바람이었는지 한창 피아노 배우는 것에 빠져 있었다. 하교를 하면 곧장 피아노 학원에 가서 여러 가지 곡들을 연습하곤 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노래 하나를 발견했다. 최대한 다양한 곡을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악보를 이것저것 넘겨보다가 제목이 예뻐서 눈에 들어온 제목이었다. 그것은 <숲 속의 오솔길>이었다. '이거, 쳐볼만하겠는데?'라는 생각에 도입 부분을 막 지나갈 때 즈음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무거웠고 뜨거웠던 감정이었다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


밀려오는 무거움으로부터 가까스로 빠져나오려 노력하면서 겨우 곡의 중간쯤 도달했을까,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은 나의 감각기관을 타고 여러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동안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채 그저 추상적으로 흝으러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아 한 군데로 모여드는 순간이었다. 곡의 선율들이 이어질 때마다, 할머니와의 기억들이 연주되고 있었다. 그동안 할머니의 부재를 잊고 있었던 나에게 그녀를 다시 기억할 때가 돌아왔다는 것을 제대로 정리할 때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날 이후로 한 일주일을 내내 이 곡만 쳤다.


매일마다 똑같은 곡을 하나 두고 어떤 날은 울었고 어떤 날은 웃음 짓기도 했고 어떤 날은 심장이 쿵 내려앉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그 일주일 사이에 9살 내가 흘릴 1년 치 눈물을 다 쏟았을 것이다. 피아노를 치고 또 쳐도 할머니와의 기억으로 인해 더 이상 슬프지 않았을 때, 눈물이 흐르지 않을 때, 아프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할머니를 보내 드릴 수 있었다.




나름대로의 사건이 있고 나서 약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숲 속의 오솔길을 몇 번 치지 못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극이 분명 필요하듯 그동안 나의 피아노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더 어려운 곡들을 연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저 여섯 글자의 제목만 보면 어딘가 져릿한 느낌이다. 마치 수술한 부위를 무사히 봉합하고 그것의 아픔이 나아지는 와중에 한 번씩 느껴지는 저릿함과 쓰라림, 그 정도의 느낌이랄까.


성인이 된 이후 경험했던 여느 이별들보다 힘들었던 할머니와의 이별을 결국 내 손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것은 매듭 지었어야 했던 할머니와의 마지막을 매듭짓지 못한 나에게 우연찮게 주어졌던 정리의 기회였던 것 같다.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일어나야 했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통하는 것 하나 없는 우리는, 베스트프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