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형제나 자매 혹은 남매를 키우는 집이라면 숱하게 들었을 잔소리이자 과학의 언어로 자리 잡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교를 하며 누가 더 예쁜 자식인 지, 누가 더 좋은 자식인 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얻고자 끊임없이 도전해 온 자식들을 일제히 힘 빠지게 하는 그 말. 그 말을 나 또한 지난 26년을 두 명의 동생과 함께 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수많은 과정의 끝에 이것은 사실 상 말이 안 되는 말임을 깨달았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어도 더 아픈 손가락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손가락 하나는 이미 다쳐있다던가.
어릴 적부터 지나치게 잘 먹고 건강했던 나와 남동생과는 달리 여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약하게 태어났다. 때문에 본래 아기가 태어나서 2kg이 넘지 않으면 인큐베이터라는 기계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동생이 그 주인공이 될 뻔했다. 될 뻔했다'는 것은 어쨌든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건데 막판에 모유를 열심히 먹었던 덕분에 인큐베이터 행은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딱 거기까지가 동생의 수난기였으면 좋았을테지만 동생이 9살이 되던 해에 이유 없는 복통과 갑작스럽게 두드러진 몸의 빨간 두드러기로 인해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당시 병명은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소한 '알레르기 자반증'. 알레르기 자반증이란, 알레르기의 일종인데 증상에 관련된 구체적인 이유는 따로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해결책 또한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고 연약했던 체구에 명확한 치료법도 알지 못한 채 동생은 기약 없는 투병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동시에 우리 가족 모두의 투병이기도 했다.
그 기간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나와 남동생은 외할머니댁에 잠시 맡겨진 채, 우리 가족의 주 생활공간은 병원이 되었다. 이유도 없는 알레르기가 늘어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과 동시에 복통이 동반되었다는 점이다. 동생은 빈번하게 복통을 호소했고 그럴 때마다 할 수 있는 것은 진통제를 복용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동생의 모습을 간간히 전해 들으며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프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 나이 13살 때였다.
마냥 힘들기만 하라는 법은 없는 건지 기약 없는 시간에 모두가 반쯤 체념하고 있을 무렵 즈음, 정말 말 그대로 기적이 찾아왔다. 정확히 콕 집어서 무슨 이유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병원 측의 꾸준한 의료개발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고 동생의 면역력 강화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병이 놀랍게도 치료되어 동생의 건강이 회복되었고 그녀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됐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병원생활을 했던 탓에 동생은 유년기의 꽤 많은 페이지를 기록할 수 없었고 따라서 또래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어야 하는 성장의 단계들이 외부로 표출되기보다는 주로 내부를 향해 쌓여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덜 성숙하고 더 예민한 성격적 차원으로 발현되기 시작했으며 이내 여동생의 대표적인 기질이 됐다. 그 책임의 8할이 동생을 가졌을 당시 힘들었던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이러한 죄의식은 때때로 동생의 행동에 면죄부를 부여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당연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다는 이유로 언제나 동생을 감싸들려고만 했던 엄마의 태도와 그러한 태도로부터 삐딱선을 타는 듯한 동생의 모습을 마냥 응원해줄 수 있을 만큼의 관대하고 착한 딸과 언니가 못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솔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생보다는 4살이 많지만 당시의 나 또한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 마땅할 만큼 마찬가지로 어렸기 때문에 질투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더불어 막내라는 위치성이 또 한몫을 했던 탓에, 나는 언제나 '큰 딸'로서 '언니'로서 때로는 참아야 했고 때로는 지켜봐야만 했다. 뭐랄까 크기에서부터 농도, 질감 그 어떤 차원에서든 동생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나의 것과는 태초부터 다른 느낌이었다. 내 평생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닿을 수 없는 저만치의 아주 숭고하고 희생적인 사랑 말이다.
엄마에게 느꼈던 서운함의 화살은 자연스럽게 여동생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똑같이 잘못을 해도 언니라는 이유로 내가 더 혼날 때, 맛있는 것을 동생에게 더 챙겨주는 듯 한 느낌일 때, 동생이 아플 때만 더 걱정해주는 것 같을 때 나는 특히 온갖 서운함과 분노에 휩싸여서 동생을 있는 힘껏 미워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짤 하나로 모두 표현되는 당시의 내 심정
그렇다고 해서 365일을 매일 동생을 미워하고 동생과 싸웠던 것은 아니다. 동생의 아팠던 기억과 더불어 함께 해 온 세월이 세월인지라 그래도 핏줄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라고 나름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주려고 노력했다. 다만 애증이라는 감정은 증오 그 자체의 감정보다 얄궂어서,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잘 지내게 하다가도 특정한 분노의 계기만 마련이 되면 언제 좋았냐는 듯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최고치로 끌어다 준다.
완전히 좋아할 수 없는 그렇다고 완전히 싫어할 수만은 없는, 명확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감정. 이것은 마치 -1과 +1이 만났을 때 0이 되어버리듯, 결국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하고 이루지도 못한 채 매번 현실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메커니즘이자 나와 여동생의 관계성이었다. 그래서 지난 십몇 년 동안 엄청나게 싸우고 싸우며 또 싸웠다. 거기다 엄마까지 등판하던 날이면 나는 동생을 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동시에 동생에 대한 엄마의 그 사랑이 언제까지 견고하게 지속될 것인가? 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확인을 하고자 했던 어린 날의 오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겹게도 길고 힘들었던 그 싸움 끝에 내가 느낀 것은 어쩔 수 없는 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해도 그러기가 힘든, 그럴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엄마에게는 여동생이 그러한 경우였다. 엄마는 여동생에 대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은 스스로도 평생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여동생이 아프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녀는 여전히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하고 함께 아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여동생을 미워하며 힘들어하던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을 엄마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늘 미안해했다. 예전 같았으면 듣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을 엄마의 마음들을 나는 이제야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된 시간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나는 이들의 관계성에 대한 깨달음을 그냥 그 자체로 수용하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쟤(여동생)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맞았네!"
아무리 생각해도 여동생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맞는데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엄마는 그건 또 아니라고 말한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냐며 부모한테 자식은 다 똑같이 사랑하는 존재라면서 말이다. 어쩌면 엄마의 이러한 변명이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 같은데 말이다. 엄마의 말처럼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 하지만 이미 상처가 나 있는 손가락을 다른 손가락들과 함께 깨문다면 그건 분명히 더 아프기 마련이다. 아플 수밖에 없다.
정말 감사하게도 어렸을 적 이후로 동생은 또다시 크게 아팠던 적 없이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거의 인생의 절반을 동생을 미워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던 나 또한 그녀에게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고 따라서 이제는 '싸운다'라는 표현이 무색하고 어색할 정도로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는 일도 많이 없어졌다. 더 나아가 앞으로는 부모님께 받는 사랑을 경쟁하는 대상으로서 언니가 아니라 엄마의 입장에 서서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서 언니가 되어야겠다고 매번 생각한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많은 첫째들이 느끼는 감정들에 온전히 공감하며 혹시라도 비슷한 경험들에 의해 그들이 오랫동안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위로의 글로 이 글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