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저녁의 술자리에서
하루 내내 우중충한 날씨에, 비가 세차게도 오던 어느 여름의 저녁이었다. 그토록 궁금해하고 바라왔던 사람과 저녁을 먹은 뒤, 2차로는 어느 술집을 갔다. 그래도 술의 힘을 빌리면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해가 땅 끝까지 저물도록 멈출 생각이 없었던 비는 술집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의 어깨를 적셨고, 고군분투를 하며 자리 잡은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와중에 겨우 안면을 텄다고 생각한 나의 안도감이 금방 사라져 버릴까 무서웠다. 언젠가 불쑥 고개 내밀 어색함의 순간이 겁이 났던 까닭이다. 그래서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일종의 농담 반 진심 반의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다시 태어나면 너는 뭐가 되고 싶어?
사실상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나의 물음. 그 막연하고 추상적인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망설임도 없이 새가 되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새가 돼서 떠나고 싶을 때 떠나며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나이브하지 못했고 그것은 오히려 묵직하다면 묵직한 편에 속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대화 속에 꽤나 많이 등장하는 '가정법'은 그저 가벼운 상상 내지는 허황된 소망이라고 말 하기에는 생각보다 무거운 용법이다. 우리가 늘 마주하는 당장의 현실에 아주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장난을 빙자한 일종의 진실된 고백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은 내가 들어온 많고 많은 가정법들 중에서도 진실돼 보였다.
이내 생각이 많아졌다.
그의 대답이 끝난 찰나에 참 많은 생각들이 나를 오갔다. '그동안 무엇이 그의 눈꺼풀을, 어깨를, 발을 무겁게 했던 걸까', '내가 마주하고 있는, 웃는 얼굴의 그가 사실은 힘들어서 우는 날이 더 많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들이 내 머리를 가득 채우던 순간, 순간에도 내 눈은 여전히 그리고 부지런하게 미소 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아주 잘 익은 오렌지의 과육과 껍질을 동시에 깨물어 먹은 듯한 느낌이었다. 달콤함과 어딘가 모를 씁쓸함 내지는 떫은맛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새가 되고 싶다던 대답이 자주 떠올랐고, 그럴 때면 불확실성이라는 소용돌이 안에서 여기저기 이끌려 다니는 느낌이었다. '아주'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히'라도 그의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전전긍긍하는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언젠가 결국에는 미련도 없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그였다.
슬픈 예감은 보통 틀리는 적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뭐든지 진득하게 붙잡는 것 하나는 잘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나는 어찌 됐건 그 사람만큼은 붙잡을 수 없었다. 아마도 내가 붙잡을 수 없었다기보다 그 사람이 남아주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만약, 처음 그와 마주했을 때 다음 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에 대해 조금 덜 생각하고 추측했더라면 나는 더 나은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었을까. 아직도 가끔씩 그때의 달콤 쓸쓸했던 분위기와 후회가 막연히 동반되고는 한다. 그 중심에 있던 그 사람의 얼굴은 물론이다.
두 발이 땅에 닿고 있어야만 행복한 나와 두 발이 땅에 떨어져 있어야만 행복할 그는 어쩌면 처음부터 참 많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너무 간절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돕는다'라는 속설 하나만 믿고서 조금이라도 땅에서 떨어져 보자 노력했다. 결국 아무리 간절하고 간절해도 끝까지 우주가 모른 척할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다만 그가 그토록 원하던 새가 되어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다가도 한 번씩은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에 머물렀다가 갈 때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