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지향하는 한 방황한다. by <파우스트>
[Prologue]
이 책으로 말하자면, 같이 읽고자 했던 사람들이 없었으면 분명 1탄도 못 읽고서 내던지고 말았을 작품이다. 지금껏 읽었던 소설과 희곡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만큼 난해하고 또 난해했다. 1탄은, 그래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 구나'라고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였으나 2탄에 가서는 '개연성이 1도 없는 듯한 이 전개가 과연 소설이 맞는가?' 라는 생각에, 읽을 때마다 본의 아니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읽다 고전은 고전답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돌아볼 수 있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강력하게 존재했다.
이를테면 젠더 중립적인 AI의 제작과 등장, 영아 살해에 관한 문제의식, 제국주의의 발현, 대량으로 이뤄진 화폐 통용에 관한 부분이 그러하다. 괴테가 살았던 당시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미래 사회의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괴테는 정말 단순한 작가를 넘어 천재였음이 분명하다. 문학은 물론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예술 등 모든 분야를 꿰뚫는 안목이 대단한 인물 인정. `천재`라는 단어로도 그를 수식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난이도와는 별개로 각종 명언과 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꽤 마음에 남는 문장들이 많아 읽는 재미가 있었던 책이다.
/ 인상 깊었던 대목들
1) 사랑하는 이를 위해선 내 살과 피를 바치겠소, 하지만 아무도 믿음과 교회를 강요당해선 안 되오. 누가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소? 누가 고백할 수 있겠소, 내가 신을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느낀다고 해서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모든 것이 당신의 머리와 가슴으로 밀려들어와 영원한 비밀을 간직한 채 보일 듯 말 듯 당신 곁에서 떠돌고 있지 않소?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으로 당신의 가슴을 채우구려. 그리하여 당신이 온통 행복감에 젖게 된다면, 그것을 행복! 진심! 사랑! 신! 무어든 원하는 대로 이름을 붙이구려, 나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소. 느끼는 것만이 전부지요. 이름이란 공허한 울림이요, 연기요, 안갯속에 휩싸인 하늘의 불꽃일 뿐이오.
2)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3)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미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실현되고, 형언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이뤄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
4) 인간은 지향하는 한 방황한다.
5) 파우스트의 눈을 멀게 한 '근심'의 대사
누구든 내게 한번 붙잡히면, 온 세상이 쓸모없게 되지요. 영원한 어둠이 내리덮여서 해는 뜨지도 지지도 않고, 외부의 감각이 완전하다 해도 내부엔 어둠이 자리 잡게 됩니다. 온갖 보화 중 어느 것 하나도 제것으로 소유할 수 없어요. 행복도 불행도 시름이 되어 풍족한 속에서도 굶주리게 되지요. 환희든 고뇌든 간에 다음날로 밀어젖히고, 그저 앞날만을 고대할 뿐 결코 아무것도 이루질 못해요.
6) 자기만 살아남겠다는 건 이기주의의 신조지. 거기엔 감사도, 정분도, 의무나 명예도 없느니라. 잘 계산해 본다면, 이웃집의 화재가 너희까지 삼켜버린다는 걸 생각지 못하느냐?
9번 문제를 일으키고, 1번 좋은 일을 한 사람과 9번을 좋은 일을 하고, 1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을 때 결과적으로 치명타를 입는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듯이 주인공 파우스트에게 느꼈던 미묘한 배신의 감정 또한 이에 기초한다. 늘 누구보다 지적이고, 선하고, 윤리의식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이야기하던 그가 어쩌면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 책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지점에 가닿게 된다.
흔히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자주 쓰이는, 아니 기독교적인 개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는 무어라고 정의하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평생 죄를 저지르며 살다가, 죽을 때가 다 되었을 때 정말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서 받을 수 있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루하루 충실히 신을 믿고, 그에게 온 삶을 다 내주며 살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교회에 꼬박꼬박 가지는 않아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을 생각하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건가? 파우스트의 경우는 사실 신의 영역을 좇지만, 그렇다고 신을 열심히 믿는 것도 아니었고 교회를 다녔다는 내용도 없고 마지막에서 절실히 회개를 한 적도, 명확히 드러난 바가 없다.
대강 이것으로 미뤄봤을 때, 구원에 관한 어떤 큰 결말의 교훈을 주려고 했던 의도보다는 젊은 영혼으로 변한 파우스트가 느꼈던, '찰나이지만, 순수한 마음과 상대방에 관한 진심, 열정 등이 결국에는 구원의 형태로 본인에게 발현된다(?)'라는 의도였던 것 같기도 하다. 늘 일을 벌이고 다니면서 수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그가 파우스트의 여느 전작들처럼 파멸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그에게서 찾아본다면, 뭐든지 끊임없이 배우고 경험하려 발버둥 쳤고, 삶을 향한 이런 의지는 노력하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는 태도에서만이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파우스트가 영혼의 구원을 통해 `인간승리`를 실현하고, 이러한 결말이 책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자유' 와 '낭만'을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길 뻔한 그 순간 나타난 여성의 순수한 사랑 덕분에 그가 살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그렇다. 책 전반에 걸쳐 괴테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이러한 가치들을 동력으로 하는 인간의 삶이 아니었을까. 때로는 잘 다듬어지지 않아 서툴고 거친 존재만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들에 관해서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이 책은 파우스트를 두고 말하길, 신의 경지를 좇아 방황하는 인간이라고 하지만 파우스트는 사실 이름 붙여진 '신', 그러니까 종교적인 의미로 모든 것에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고자 방황했던 것보다는 무엇보다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에 기반하는 인간의 삶에서, 모든 분야와 영역을 아우르는 전문가가 되고 싶었던 인물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신을 갈망한다기보다는 신에게 도전하고 저항하며 인간으로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고자 힘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