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승리, 오늘날의 계엄령을 보며 선택의 의미를 곱씹는다
2024년 12월 3일 밤 11시, 헤까닥한 대통령에 의해 웬 뚱딴지 같은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깜짝 놀란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사당으로 집결했고, 영화에서나 보던 무장군인과 장갑차가 여의도 한복판에 나와 있는 것을 목도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군인들은 상부의 명령이라고 덮어놓고 충성하지만은 않았고, 국회의원들은 군인들을 지나 무사히 안으로 들어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표결을 진행할 수 있었다. 만장일치로 계엄 해제가 요구되었고, 대통령은 헌법상 이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계엄령은 3시간여만에 해제되었다.
나는 그때 하필 10시쯤부터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 3시에 문득 깼는데, 휴대폰을 보니 스웨덴에 있는 남자친구에게서 걱정어린 문자가 와 있었다. “한국 대통령이 긴급 계엄을 선포했다는 기사를 봤는데 독재라도 하려는 건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제야 뉴스를 확인했고, 밤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 알았다. 이미 국회에서 계엄을 무효화한 상황이라 큰 걱정 없이 다시 잠에 들기는 했지만. 실시간으로 계엄 소식을 듣고 무장 군인이 국회에 들어찬 모습을 봤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한국 정치는 대혼란에 빠졌다. 명분도 개연성도 없는 계엄 선포는 짧은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로 인해 윤석열은 국내에서도 국제사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식물 대통령이 되어 조기퇴진하거나 탄핵당할 일만 남은 듯 하다. 첫번째 탄핵 때야 아무리 대통령직에 올랐어도 제 역할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국민의 힘으로 내칠 수 있다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5년에 한 번 뽑는 국가원수를 또다시 탄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다니 이것은 한국 정치의 비극이라고 느낀다.
나는 정치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번 계엄 사태 이후로는 하루가 다르게 밝혀지는 진상, 그리고 전개되는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진진하여 갑자기 정치 뉴스에 눈을 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보다보면 지난 역사와 결부하여 이번 계엄 사태가 얼마나 위험한 시도였는지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간 군부 정권이 쿠데타를 통해 나라를 장악했던 시절이 있었고, 계엄령 하에 시민들의 생명과 인권이 무참히 짓밟혔던 사건이 얼마나 많았던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십수 년 전에 요약된 텍스트로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읽었을 뿐이라 애당초 빠삭하게 알지는 못했고 또한 기억이 많이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계엄, 내란, 계엄, 내란, 이런 텍스트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난 현대사를 복기하게 되었고 궁금해서 자꾸만 파헤치게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보고 읽었고, 그 주범으로 꼽히는 전두환이 애당초 어떻게 쿠데타를 벌여 정권을 잡았는지 보았다. 그러다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나라 정부와 국군에 의해 제주도의 평범한 사람들이 무차별학살 당한 4.3사건에 대해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때도 명분은 제주도가 공산당에 넘어간 빨갱이 집단이라는 것, 그리고 광주에서 일어난 참혹한 일들을 무마하는 명분 역시 그들이 빨갱이 폭도라는 것이더라.
일단 그들이 공산당이나 북한과 연루된 폭도라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제주도의 경우는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 내지 우리나라 정부가 남북으로 쪼개져 따로 선거를 치르는 것에 반대하던 사람들이었고 광주의 경우 전두환과 신군부의 정부 장악과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외치던 깨어 있는 국민들이었다.) 그런데 설령 공산당이고 빨갱이라고 한들, 이념이 다른 국민이라면 무차별 학살해도 되나?
고작 이념일 뿐인데, 고작 이념 때문에 남북이 갈라져 100만 명이 죽고 다치는 전쟁을 치르고 이념으로 전쟁을 치르던 냉전 시대에는 그 이념이 충분히 죽고 죽일 만한 문제였던 거겠지. 그 이념이란 게 무엇이라고 국민들을 학살하는 정당한 명분으로 활용되기까지 했을까 싶다. 인간의 머리와 마음을 지배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생면부지의 타자를 기꺼이 증오하고 죽이게도 만드는 그 이데올로기라는 게 참 무섭다.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란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위해, 내가 죽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세상인 걸 알면서도 내 생애의 전부인 생명을 바치기까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그 많은 사람들의 선택이 고귀하고 가치 있었음을 믿는다.
체제는 시간을 두고 변한다. 그 과정에서는 항상 총칼이 있고 죄없이 죽어간 무수한 사람들의 피가 흐른다. 인간은 항상 제 욕심을 좇기 때문에 체제가 불완전하고 흠결이 많을수록 사회 전체가 고통 받고 희생은 끝이 없다. 권력을 쥔 인간이 나쁜 마음을 먹어도, 더 큰 욕심을 품게 되어도, 혹은 어리석은 판단을 하더라도, 그 피해를 축소하거나 끊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체제의 힘이다. 이번에 최고지도자이자 군통수권자가 비이성적 사고로 계엄을 선포해버렸어도 시스템이 그의 행보를 무력화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의 이 체제를 만들어낸 것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그 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과 선택이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종종 생각한다. 행복? 그럼 인간이 행복해지는 조건은 무엇일까. 재물을 좇는다면 끝없이 목이 마르고, 일신의 안락함을 얻어도 이내 무료해지고, 쾌락을 좇는다면 파멸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마음이 진정으로 충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것은 타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기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타인의 삶에 기여하려면 내가 손에 쥔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게 역설적으로 내 삶을 가치있고 빛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의미 있게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무엇일까?
불우이웃을 돕는 것보다, 혹은 자선단체를 세우는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정치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이 되어 좋은 발의와 의결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커다란 스케일로 세상을 도울 수 있는 건 우리 사회가 더 좋은 체제를 찾아가는 변화의 과정에 힘을 보태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은 어느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적 사건과 시행착오가 쌓이고 쌓여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제주 4.3 같은 광란의 학살을 용인하는 나라에서 지금처럼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대통령의 오판을 통제할 수 있는 나라로 발전하기까지, 이름 없이 희생 당한 그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곱씹어보자. 그것은 덧없는 삶인가, 가치 있는 삶인가? 많은 사람이 그저 찰나와 같을 영화를 좇다가 덧없이 가고, 또 어떤 이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 법한 악을 뿌리다 가지만, 그들의 삶과 죽음은 세상을 더 올바른 곳으로 나아가게 했다. 최고로 의미있는 삶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알아가는 데 몰두한 채로 제주도 워케이션을 오게 되었다. 평화로운 제주도의 해변 마을을 보면서, 70여 년 전 지금보다 더 고요하고 평화로웠을 이 마을에 토벌군이 쳐들어와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쏴죽였겠구나 생각하니 참 기분이 이상했다. 처절했던 현대사의 여러 사건들을 시각 자료와 함께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유튜브 영상도 보고, 책도 읽었다. 세상에, 제주도 놀러와서 웬 역사 공부를 이렇게 하고 있는지.
그렇게 되다보니 또 영화 ‘서울의봄’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12.12사태나 전두환에 대해서도 이미 너무 많이 읽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쿠데타가 계획되고 또 성공하는지 이미 다 알지만, 그래도 한 번 봤다.
다 아는데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정말 잘 만든 영화였다. 전두환의 엑스맨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트롤짓을 하는 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며 속이 터졌고, 결국 반란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난 역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다시 보면서 울화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그 직후에 저놈이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어떻게 진압하고, 그럼에도 죽는 날까지 제대로 된 처벌도 참회도 없이 얼마나 떵떵거리며 살다 갔는지 알기에 더 먹먹한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여운이 남아 영화 속 인물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들의 삶이 어땠는지 찾아보았다. 끝까지 반란군을 저지하고자 사력을 다했던 인물은 죽거나 모진 삶을 살았고, 그들의 가족까지 많은 불행을 겪었다. 고생 끝의 낙도 영예도 없고, 죄악 끝의 처벌도 없었다. 깨어진 세상은 속이 시원해지는 정의 구현도 신의 개입도 없이 그렇게 흘러간다. 나라를 위해 저항한 이들은, 정말로 고통 밖에는 얻은 게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의 대가로 무엇이 돌아오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들은 주어진 한 번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고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싶은지에 따라 선택했고, 그 선택은 그 자체로 완성되었다. 이태신(정우성)의 모델이었던 장태완 장군은 신념에 따라 쿠데타에 외로이 저항하면서 돌아올 영예를 기대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이 살고자 한 삶을 살아냈을 뿐이다. 비록 그의 저항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사람들의 피와 고통이 더해져서 세상은 변했다. 장태완 장군이 노인이 되고 눈을 감은지도 수십년이 지났지만, 그의 서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잠자고 있던 의식을 깨우고, 위기 상황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를 곱씹게 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삶과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고등학생 때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 파트를 공부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나는 과연 고문과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운동가로 살았을까? 친일파가 되진 않았을까?’
그리고 또 ‘서울의봄’에서 자신의 이익 또는 안전을 위해 신군부 편에 붙거나 회유에 넘어간 많은 군인들, 반면 바른 신념을 가지고 반란군을 저지하려다 죽는 인물들을 보며 또 생각하게 된다. ‘내가 저기에 선 군인이라면, 나라를 위하는 이태신 편에 설 수 있었을까?’
솔직히 교과서로 볼 때야 친일파를 욕하지만, 내가 그 시대를 살았고 일제의 폭력과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더라면 과연 독립운동을 선택했을지 자신은 없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독립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아닌 미국의 힘으로 얻어졌다는 걸 알고 있으니 더더욱.
하지만 한 번뿐인 이 삶, 아무리 많은 것을 누려도 덧없기만 할 이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의미가 있을지를 고민하는 삼십대의 나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알 것 같다. 창조주에게 선물 받은 영혼으로 내 욕심만을 좇기보다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고, 다른 이의 삶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삶을 살아내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면. 사회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거나 힘을 보태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통스럽더라도 세상이 더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나라는 한 인간의 의지와 신념을 다해 힘껏 한 번의 노라도 젓고 간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을 가졌던 의미로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