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두 번, 우리 회사는 S/S와 F/W의 시즌제품 기획발표회를 준비한다.
이 중요한 시점은 단순한 업무의 연장이 아니라, 디자인 팀의 피땀 어린 노력이 응축된 결과물을 보고하는 자리이다. 디자이너로서, 그 과정에서의 긴장과 열정은 또 다른 성장을 일구어내는 중요한 순간을 준비하는 시간과 과정이다.
그러나 이번 시즌에는 상황이 다르다. 퇴사를 앞둔 나는 그 열정적인 준비에서 한 발 물러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회사의 발표회 준비는 단순한 일상이 아니다. 매번 이 중요한 행사가 다가오면, 두 달여의 시간을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수개월 동안의 치열한 작업과 끊임없는 수정, 그리고 그 와중에 계속 쳐 내야하는 끊임없는 본작업과 업무적 미팅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긴박하게 움직이며, 매년 회사의 가장 큰 행사이기도 한 기획보고자리는 우리에게는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대규모의 프로젝트처럼 느껴진다. 잘 해야 하고, 잘 해내야 하고, 이 작업을 토대로 내년 기획의 큰 틀을 잡고, 매출과도 직결되는 작업이기에 무엇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방식과 스타일로 작업물을 모으고, 이 시기만큼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한 밤의 늦은 퇴근,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야간작업, 또 때로는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며 수정과 샘플링의 무한반복의 과정을 거치며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그 과정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평온한 호숫가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바쁘게 지나가는 새떼와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동안의 과정이 고되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경험과 노력이 떠나가는 나의 발걸음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매년 반복된 준비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고 나만의 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회사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경력을 넘어서, 나를 들여다보고, 내 삶의 소중한 경험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간들이다. 힘든 작업 속에서도 동료들과의 유대, 끊임없는 자기 발전, 그리고 창조적 과정의 즐거움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고, 그 안에서 뿌듯함도 정말 많이 느꼈다. 물론 회사의 좋음과 나쁨은 직장인이라면, 뗄래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그걸 감안하고 생각하더라도,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최고까지는 아니었어도 내가 경험한 수많은 감사한 기회들, 부서들과의 협업, 한 브랜드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경험과 과정들. 돌이켜보면, 이 모든걸 다 경험해 볼 수 있었기에 값지고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얻은 것 또한 많았다 라는걸 부정하지 않는다. 이번에 기획 보고회를 준비하지 않으면서, 그동안 내가 해왔던 과정과 노력이 어떻게 나에게 자아를 부여했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다.
회사를 떠나는 순간, 그동안의 경험과 기억은 나의 일부가 되어 떠나갈 것이다. 그 경험들은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내 미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며, 나는 이제 그동안의 노력을 자랑스럽게 돌아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지금의 평온한 시점에서, 나는 그 모든 경험을 감사히 여기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디자인의 세계는 그 끝자락에서조차도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하나의 챕터가 끝나가는 시점에 그 끝자락에 서서, 새로운 여정을 기대하며 한걸음 내딛고 있다.
이 곳에서 내 일을 할 수 있음에 정말 많이 감사했고, 많이 즐거웠고, 뿌듯했고 너무 재밌었다. 말도 안되는 체계에 기함을 토하고, 싫어하고, 화도 많이 났고, 열과 성을 다해 최선을 다했던 곳. 그간의 시간동안 미운정 고운정 많이 들었던 나의 회사. 그 끝이 다가오니, 그동안의 시간과 지금의 이 시간들이 자꾸만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가슴 저기 어딘가에 지끈한 뭔가를 자꾸 느끼게 한다. 나도 모르겠는 이 마음들.
그럼에도 오늘은 감사함이 더 크다..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