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앞에서 나는 작아졌다.

작고 단단한 사람, 나태주

by 주디의 작은 방

강연장에 도착한 건 이른 아침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객석은 차분히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조용히 설레었다. 나태주 시인을 만나는 날이니까.

시로만 접해온 그분을 실제로 뵙는다는 건, 마치 오래된 시 한 편이 눈앞에서 살 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일이었다.


무대 위에 오르신 나태주 시인은 체구가 매우 작으셨다. 마치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릴 것 같은, 그러나 그 안에 단단한 중심이 있는 분. 새벽에 택시를 타고 멀리서부터 이곳 강연장까지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 몸에 깃든 시의 무게와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옆엔 나민애 교수님이 있었다. 시인을 향해 툭툭 내던지는 말들 속엔 묘하게 따뜻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느껴지던 말들이 어느 순간 아버지를 걱정하는 딸의 말처럼 들렸다.

아, 저 두 사람은 그냥 ‘시인과 교수’가 아니라, 삶과 문학의 긴 대화를 함께 걸어온 사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의는 각자의 발표로 시작되었고, 마지막엔 무대 중앙에 동그란 테이블 하나가 놓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삶을 이야기하고, 시를 이야기하고, 사람을 이야기했다. 말들이 따뜻해서 마음이 자꾸 풀어졌다.


강의가 거의 끝날 즈음, 삼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한 여성분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교수님은 힘들 때 어떻게 하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민애 교수님이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전요… 엉엉 울어요. 화장실에 가서, 막 울어요.”
그리고는 진짜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셨다. 순간 객석이 숙연해졌다.

당당한 모습과 지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무대 위 교수님이 말을 잊지 못하고 우는 모습에 나도 울컥했다.

‘서울대 교수도 사람이고, 나와 다르지 않구나.’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이 유난히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나는 이 강연장에 앉아 있는 내가 조금 위로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사인회가 시작되었다. 긴 줄의 끝에 서서,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계속 마음속으로 연습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감동이었어요”, “풀꽃처럼 살고 싶어요.”

그런데 내 차례가 오자, 목이 꽉 막혀버렸다.


' O O O 님.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2025,6,11

나태주'

그저 노트를 건넸고, 나태주 시인은 말없이 시를 써주셨다.


‘풀꽃’ 그 익숙한 두 글자를 정성껏, 또박또박 적어주셨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 한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말 한마디 못 건넨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속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나를, 나태주 시인은 이미 알고 계신 듯했다.

말을 아끼는 사람, 조심스레 마음을 꺼내는 사람, 풀꽃처럼 작은 존재 하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시는 시인.


그리고 그날, 나는 무대 위 두 사람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딸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외로움을 알아채지 못하는 딸. 나민애 교수님이 시인을 향해 쏟아낸 따뜻하고 투박한 애정이, 왠지 내 안의 오래된 감정을 건드렸다.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시인은 말했다. 나는 그 말처럼, 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겠다고,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고 이 삶을 오래 바라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말은 못 했지만, 나의 마음은 전해졌으리라 믿는다.
풀꽃 앞에서, 나는 작아졌고, 그래서 조금 더 나다워졌다.




by 주디의 작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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