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이야기 10
음악과 이야기 10 : 라식 - 기리보이
아티스트 기리보이의 2020년 발매작 '영화같게' 앨범의 3번 트랙
'초점을 잃어가도 보고 싶어'
'너와 보고 있던 게 까만 미래였어도 보고 싶어'
3년 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이 하나 있다. 이 브런치를 나름 블로그의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여기고 있으니 내 지난 글을 인용해 본다.
렌즈
2021년 12월 29일 4:41
길게 뻗은 숲 목조 의자에 앉아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찍는 걸음이 자꾸 뒤를 향한다면 나는 앞으로 넘어질 거라고. 그렇게 넘어져서 한사코 일어나지 않는 비파 소리에 축을 맡기고 몸을 고정시킬 거라고. 낙엽과 눈물을 돕는 바람도 걸음에겐 무표정하다. 다시 기어 나와야 하는 숲의 천막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심정은 그러하다.
밖에서 떠다 놓은 물을 마시고 정갈한 옷을 꺼내 입는다. 응고된 상처는 명명되기를 거부하고 새살 속에 녹아든다. 가장자리에 놓인 미나리 싹을 빤히 쳐다보는 마음도 뒷걸음치는 행위와는 구별된다. 다만 지속성의 압박 속에 단조로운 여백일 뿐이다. 다행히 어떤 감미로움이나 다정함도 찾아볼 순 없다.
더 우거진 곳에서 사과 한 알을 발견한 나는 베어 물기를 망설인다. 씨앗 하나를 심고픈 마음에는 당분에 관한 결백이 개입한다. 열매가 지면과 만나 들짐승에게 파 먹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과육을 섭취하고 남은 씨앗을 소중히 받아 양지에 묻어주어야 하는가. 한참을 고민하다 우물을 발견해 사과는 옆에 두고 반들반들해질 때까지 내 손을 씻는다.
헐떡이는 들개 한 마리를 발견해 사과를 건넨다. 아직 내 손은 깨끗하다. 아니 깨끗해진 걸까. 여전히 뒤는 돌아보지 않고 뒷걸음질 친다. 빨라진 발걸음에 어느덧 숲의 중심부에 다다른다. 커다란 늪지대를 감싸는 아득한 하늘이 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구름의 그림자에 올라타 홍수림에게 다가간다.
구름을 놓아주고 내린 초록의 핵. 차가운 껍질을 쓰다듬다가 한참을 껴안는다. 아무런 물리적 반응이 없다. 내 기력은 금세 고갈된다. 네 다리로 엎드려 그림자의 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영영 숲에서 벗어나려 함은 아니다. 숲은 또 다른 숲으로 이어지고 나는 그 길을 따라 뒤집힌 풍뎅이처럼 실려간다. 의식이 쉼 없이 배영을 하는 동안 육신은 그림자의 구름에 매달려 세상을 내려다본다. 숲과 숲을 잇는 세계의 발견. 결국 의식은 탈진하지만 돌봐 줄 육안이 있어 괜찮다.
너무 넓은 숲은 심장의 위치를 모른다. 너무 짙은 그늘은 실체가 된다. 나는 숲을 보고. 숲은 하늘을 보고. 또다시 나는 하늘이 빛나는 숲의 눈을 보고. 이제 나는 주렴이 걷힌 하늘을 보고.
이 글의 제목을 어째서 렌즈로 했을까. 아마도 나는 주렴이 걷힌 하늘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 하늘에 별 하나 없고, 내가 서 있는 곳이 내가 꿈꾸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지구 반대편의 모습이더라도. 물감처럼 선한 검정을 억지로라도 보고 싶어서 묽게 번진 색들을 쓸어 모았을 것이다.
기리보이의 라식을 들으면 이 글이 떠오른다. 라식과 렌즈는 엄연히 다르지만 시력의 벽을 넘어 시야를 또렷이 하기 위한 매개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도 난해하고 가끔은 그래서 성역화하게 되는, 그리고 끝내 모래성처럼 허물고서는 경계하고 마는. 아무래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다시 못 보는 지난 날의 내 모습이다.
모자이크 된 그 사진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먼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후유증을 부르는 꿈처럼 보고 싶을수록 더욱 외면해야 하는 역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