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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이야기

음악과 이야기 24

by 수영

음악과 이야기 24 : Le jardin féerique from Ma mère l'Oye - 박정은

2019년 발매작 'SKY 캐슬 OST' 앨범의 10번 트랙

원곡: Ravel의 발레 모음곡 Ma mère l'Oye(어미 거위) (1908)




속해서 적어 온 음악과 이야기가 최근 들어 어떤 변곡점에 이르렀다고 느꼈다. 더는 쉽게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새로운 가수와 곡을 다루고 싶은데, 그 곡에 얽힌 생각이 당장 떠오르는 무언가와는 맞닿지 못한다. 당연하지만 모든 생각과 감흥을 악곡의 가사와 선율에 의탁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내가 언제부터 음악을 들어왔는지 되짚어 보기로 했다. 내 안에 타오르던 마음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음악을 매일 귀에 꽂고 지내왔다. 그전까지는 음악 취향이나 음악적 자아라 할 것이 없었다. 집 근처 휴대폰 대리점 근처를 지나면 들리는 커졌다가 줄어드는 노랫소리가 하루치 청취량이었다. 덕분에 겨우 요즘 어떤 곡이 유행하는지 정도만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 빅뱅의 신곡이 나왔네. 이건 싸이의 신곡인가. 윤종신의 발라드는 몇 달째 지겹도록 유행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잠깐 하고는 굳이 집에 돌아와 찾아 듣지는 않았다. 피아노를 배운 덕에 특히 몇몇 피아노 곡을 좋아하기는 했다. 슈베르트의 소나타, 지브리 주제가, 이루마의 뉴에이지 같은 곡들. 하지만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어김없이 듣지 않았다.


음악을 들어도 특별한 감정이 일지 않았다. 그런 감정이 일어날 만큼의 어떤 사건이 내 세상에는 아직 없었기 때문일까. 저 가수는 왜 저렇게 애절하게 노래를 부를까. 지드래곤은 오늘 밤은 어째서 삐딱하게 보내자는 것일까. 동요를 부르는 일이 흥이 돋기는 하지만 이런 유치한 가사에 어떤 쓸모가 있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던 내가 고등학생 때는 음악을 하루종일 들었다. 잠에서 깨어날 때, 아침에 교실로 갈 때, 학원을 갈 때, 자습을 할 때, 잠에 들 때. 잠을 떨치려고, 기분을 환기하려고, 졸음을 이겨내려고, 그리고 다시 잠에 들기 위해, 나는 그것을 마치 약처럼 남용했다. 음악은 각성제이면서 항우울제이자 수면제였고 때로는 인공눈물이기도 했다. 그런 음악 때문에 감정의 굴곡이 심해진 것인지, 이미 굴곡진 내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음악을 이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음악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 없다.



아무래도 내가 이런저런 음악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듣게 된 것에는 별난 일화가 하나 있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 방학 때였을 것이다.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전국적으로 유행을 하고 있었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일화를 가장 먼저 꺼낼 것이다.


그전까지 1학년의 나는 마치 침전물의 형상을 하고 살았었다. 시험기간 기숙사 자습실에서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쿠션을 들고 내려와서 베고 잠을 잤다. 잠을 자고 자도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애매한 재능을 과신해 범범하게 공부를 하고 기울인 노력보다는 과분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렇게 죽은 것도 사는 것도 아닌 듯이, 마치 뒤통수만 비쳐 보이는 듯한 존재감으로 일 년을 보냈을 때 어떤 친구가 나를 불렀다. 그는 나를 게으른 천재라고 했다. 칭찬하는 말은 아니었다. 내가 가진 역량에 비해 한없이 부족한 노력을 비웃는 말이었을 것이다. 방학이 되고 집에 돌아와 나는 그 게으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연료는 충분한데 불이 붙지 않고 있었다. 계속 눅눅히 젖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근 몇 년 간의 일들을 주마등처럼 훑었다. 믿었던 친구들과 한순간 멀어진 일, 버팀목이 되어 주던 사람과의 실연, 그 외 여러 일련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물을 끼얹은 주체가 나일지 세상일지는 모르지만, 옷을 말리지 않은 선택은 나의 몫임을 알았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웃긴가.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난 아픔이 무서워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나는 내 우울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친구에게 들은 게으르다는 말, 지난 일련의 일을 되돌아본 것, 그리고 당시 방영하던 스카이캐슬의 '혜나'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들은 부싯돌이 되어 일시에 큰 불꽃이 피어났다. 혜나에 대해 세간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눈이 많았지만 나는 그의 행적과는 별개로 그 안의 독기를 보았다. 얌전히 시들어 사라지기보다 판을 뒤엎어 버리려는 그 의지가 어딘가 나를 울렸다. 내 이력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세상에서 내가 피우기도 전에 시들어 죽는 것보다는 한 번 피어올라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서론이 길었다. 그때 작중에서 등장한 'Le jardin féerique from Ma mère l'Oye'라는 피아노 곡을 듣고 있었다. 혼자서 되뇌었다. 당시로서는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이렇게 생각했다. 전교 1등을 할 거야. 최고의 대학에 갈 거야. 가고 나서 뭘 할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마음 놓고 글을 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그러고 나서는 매일 12시간 가까이 공부를 하며 불씨가 될 만한 곡은 장르를 불문하고 찾아 듣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버섯제국의 '桜が咲く前に'. 박지은의 '지쳐야겠어', 리쌍의 '독기', 포스트 말론의 'I'm Gonna Be'와 'Saint-Tropez', 패닉 앳 더 디스코의 'High Hopes', 사샤 슬론의 'Keep On', 매드클라운의 '노력의 천재'와 '외로움은 손바닥 안에', 로꼬의 '너도', 릴러말즈의 '야망'과 'COLD', 김미정의 'On Your Side', 권진아의 '스물', 원슈타인의 '거미줄', 지바노프의 '삼선동 사거리', 플로렌스 앤 더 머신의 'Dog Days Are Over', 알레시아 카라의 'Growing Pains', 에일의 'Spotlight'와 'この夜が明けるまで', 아비치의 'Wake Me Up', 김사월의 '세상에게', 헤이즈의 '오롯이'와 'No Way'. 크러쉬의 '2411', 윤하의 'Drive' 이런 곡들이었다.


우연히 귀에 꽂힌 곡을 찾아 듣거나 하던 습관에서 벗어나 귀감이 되는 가사나 울림을 가지는 곡이면 가리지 않고 틀어대기 시작했다. 가사 속에서 등장하는 '너'라는 표현은 내가 목표하는 것에 대입했다. 예를 들어 '너에게 갈 거야'라는 가사가 있다면 '목표를 이룰 거야'로 바꾸어 해석했다. 일종의 자기 암시였다.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던 말을 믿어서였을까. 나는 그러는 편을 선택했었다.



그런 음악은 지금도 내게 유효하지만 전처럼 반짝 타오르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일을 하며 살 거라 믿었기 때문일까. 나를 아는 사람들이 봤을 때 지금으로서는 그때 목표하던 것의 몇 배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줄곧 절반의 성공으로 느껴진다. 글이 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글이 아니어도 먹고살 수는 있게 되었지만 반대로 이제 그러기 위해 글을 잠시 미루어 두어야 한다. 더 배워야 하는 것들, 챙겨야 할 것들이 늘었다. 음악도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일까. 마음이 예전 같지는 않다.


하지만 언젠가 여유를 찾으면 다시 음악과 이야기는 이어질 것이다. 금방 다시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품고 찾아오리라 나에게 약속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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