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영원이

음악과 이야기 26

by 수영

음악과 이야기 26 : FLYING HIGH WITH YOU - 빈첸

2021년 래퍼 빈첸의 발매작 'FLYING HIGH WITH YOU' 싱글 트랙


'행복이 뭐 이리도 쉬워'




손전등을 켜고 새벽 두 시 반에 거실 서재 틈에서 15년 전 앨범을 찾아 펼쳤다. 원래 이런 일은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끌렸다. 그 안에는 한 번도 짓밟히지 않은 내가 보였다. 활짝 웃고 겁 없이 사랑하는 꼬맹이가 보였다. 며칠 사랑받지 않더라도 시들지 않을 만큼 충만한 마음이 보였다.


어째서 설렜다. 이 설렘이라는 것은 마치 첫 등굣길이나 데이트에서 느낀 긴장 섞인 어느 떨림과는 달랐다. 오랜 구속에서 풀려나 느끼는 해방감도 아니었다.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여태 단 두 번뿐이다. 하나는 스무 살 봄 대학에 입학해서 아직은 낯이 익지 않은 동기와 함께 캠퍼스를 거닐 때였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것의 근간을 나는 명확히 가리킬 수 있었다. 이는 내게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나 무엇이든 대비하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무엇이든 다 잘 풀릴 것 같다는 가호의 발견과도 같은 의미였다.


이 감정은 내게 있어 큰 불씨임은 분명했다. 15년 전 내가 지었던 겁 없는 표정에서 나는 내가 받아온 그리고 내가 꺼내어 보일 수 있는 무한한 사랑의 크기를 정말 오랜만에 마주했다. 하늘을 나는 방법을 자연히 생득한 모습이었다. 그 후로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억누르고 잠재웠는지는 요점이 아니지만, 단지 그 밝은 날개를 쓰지 못하고 미움과 악을 원동력으로 쓰며 시간의 능선을 넘어왔었다. 이후, 스무 살 나는 나를 두렵게 하던 것이 무엇인지 잠시 잊어버리고 다시 겁 없이 떠올랐었다. 다시 신입생이 되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겠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높이에 다시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귀한 설렘이 날개가 활짝 펴져 있다는 반증과 같다면 나는 다시 겁을 잊고 비행할 수 있다. 골짜기 아래 무성한 숲과 깎아지른 해식애를 스치며 화려한 곡예비행을 선보일 것이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대안까지 준비하는 것이 성숙에 가깝다고 믿지만, 그러한 완숙함이 곧 감흥의 역치를 높이는 일이라면 그렇게까지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 내 삶의 역설이었다. 그러니 하나를 택한다면 나는 어린아이처럼 웃는 편을 고를 것이다. 이처럼 티 없이 웃어 다가갈 때 나는 시작할 수 있고, 계속 이어갈 수 있고, 또 모든 것들을 악의 없이 사랑할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웃음은 뭐든 잘 풀릴 것이라는 증명 없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진심을 담아 소원을 빌 수 있듯이, 때로는 그 말도 안 되는 믿음이 모든 것의 시초이자 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이제 언제나 믿음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반도 믿기 어렵다지만. 세상에 믿을 것은 몇 없다지만. 그럼에도 가능성을 긍정하는 사람만이 무언가를 정말로 가능케 할 수 있다. 불신이 나를 거듭 옥죄더라도 그 속에 묶이면 내 가능성만 굳게 닫힐 터이다. 스무살 봄을 함께 한 이 곡을 몇 년만에 꺼내 들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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